-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299-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벗고도 자고 먹는 것이 소박하기가 지사 때와 같았다. 불의에 굽히지 않되 자긍하지 않음은 충성이며 도리에 따라 수식이 없음은 성실이니 충성하고 성실함은 용맹있는 국가의 우성이다. 아! 공의 쌓은 충의는 조국의 하늘 일월과 더불어 영원히 빛나리로다. 외손자 정영식 옥현 병룡 김용준 용선 용탁 강준호 성호 김형업 형준 형석 조생 한욱 석 박성준 외손녀사위 노영환 박광덕 이동근 정귀봉 최백림 박세경
후학행 군수 상산 김상조는 글짓고 김녕 김형환은 쓰고 국가의 보조와 자녀들의 청성을 모아 돌을 세우다.
서기 1983년 10월 10일 립 艮坐(간좌)
후학행 군수 상산 김상조는 글짓고 김녕 김형환은 쓰고 국가의 보조와 자녀들의 청성을 모아 돌을 세우다.
서기 1983년 10월 10일 립 艮坐(간좌)
진주에서 차를 렌트하여 찾아가는 곳은 진주시 상봉동 308 도로변 애국지사 장두관 선생 묘소 안내판이다.
위치를 조사하면서 로드뷰를 통해 묘소 안내판이 있는 것을 확인했던 곳이다.
위치를 조사하면서 로드뷰를 통해 묘소 안내판이 있는 것을 확인했던 곳이다.
애국지사 장두관 선생의 묘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장두관 선생은 진주사람으로 1919년 진주지역 3.1운동 주동자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룬 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청산리 봉오동 독립전투 및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24년 군자금 모집차 국내에 들어와 활동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30. 3 신간회 중앙위원 및 진주지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여 1954년 대령으로 예편하시었다.
■ 묘소 : 진주시 상봉동 229-4번지 / 1995년 8월 1일 진주시장
장두관 선생은 진주사람으로 1919년 진주지역 3.1운동 주동자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룬 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청산리 봉오동 독립전투 및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24년 군자금 모집차 국내에 들어와 활동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30. 3 신간회 중앙위원 및 진주지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여 1954년 대령으로 예편하시었다.
■ 묘소 : 진주시 상봉동 229-4번지 / 1995년 8월 1일 진주시장
묘소 안내판에는 묘소의 위치가 상봉동 229-4로 되어있다. 하지만 그런 번지는 없다.
저 건너편이 상봉동 299-4인데, 혹시 모르니 상봉동 229-4 인근번지인 229-2로 먼저 가보았다.
저 건너편이 상봉동 299-4인데, 혹시 모르니 상봉동 229-4 인근번지인 229-2로 먼저 가보았다.
저곳이 진주시 상봉동 229-2번지이다.
새롭게 묘소 앞에 안내판도 세우고, 올라가는 계단도 새롭게 건립되었다고 했는데, 그러한 곳을 찾을 수 없다.
처음 묘소 안내판이 있던 건너편인 상봉동 299-4로 가보자.
새롭게 묘소 앞에 안내판도 세우고, 올라가는 계단도 새롭게 건립되었다고 했는데, 그러한 곳을 찾을 수 없다.
처음 묘소 안내판이 있던 건너편인 상봉동 299-4로 가보자.
네비게이터는 이상한 곳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묘소 안내판 앞에서 직접 건너편으로 넘어오자 애국지사 묘소 안내판이 보였다.
애국지사
장두관 선생 묘
장두관 선생 묘
위쪽으로 올라가자 또 안내판이 서 있었다.
獨立志士 仁同張公 斗爟 之墓(독립지사 인동장공 두관 지묘)
묘갈명 병서 삭풍이 휘몰아치는 서백리아 벌판 만주의 황야에서 천군만마를 내몰아 조국광복을 위해 청춘을 불사르며 일군을 무찌른 불사신의 지사가 있었으니 그의 휘는 두관 일명 지관 자는 수여요. 호는 욱산 성은 장씨니 인동 세벌의 후이다. 통훈대부 사복시 정 휘 윤달은 5대조요. 가선대부 한성좌윤 휘 명은 고조요. 가선대부 호조참판 휘 석준은 증조요. 조의 휘는 지원이며 고는 중추원 의관 휘 식상 일명 영경이며 비는 해주오씨 희운의 녀이다. 공은 1900년 광무 4년 9월 23일 진주 본제에서 출생하였으며 1958년 10월 10일 58세를 일기로 졸하다. 배는 남양홍씨 경오의 녀로 1남 8녀를 두니 남 세봉은 평양 조인치의 여에 취처하였고 녀 귀달은 정인재 미화는 김동수 덕화는 강태중 선
화는 김언교 근화는 이중연 복희는 한용식 미희는 박노숙에게 출가 정희는 미성이며 손은 현익이다. 공은 영오한 자질과 강직한 기개로서 진농 재학 중 3.1독립운동에 앞장 섰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일제 항거의 일념으로 1919년 만주로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 후 이청천 장군 휘하에서 역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노두 만명월 왈이저우우두량창 싸움에서 분전하였고 소련의 내란 진압에 협조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을 원조하며 한인자치를 허용한다는 협정을 믿고 소련에서 군사활동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이청천 장군이 설립한 고려혁명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연대 대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소련 공산당에 의해 민족주의자란 죄명으로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하자 소 군과 충돌 흑하사변이라는 큰 전투가 발생 수 많은 독립군 병사가 희생되였고 남은 독립군과 같이 6개월간 포로 생활도 하였다. 그 후 만주로 돌아온 후 국부 군정치학교 교관을 거쳐 신간회 일로 밀입국하여 박춘성 외 3명과 같이 진주 금융조합 예금을 군자금으로 탈취한 사건으로 왜경에 피체 18개월간 복역하고 출옥 후 일제의 회유에도 항거 오히려 일본의 녹을 먹지 않는다는 무직회를 조직하여 애국청년들을 이끌었으며 일제말기에는 무서운 강압과 감시 속에서도 항일 고려구국회를 조직 변상태 이주현 구여순 등과 지하운동에 열화 같은 정집을 불태워왔다. 마침내 광복이 되자 서부경남 치안군사부장 광복군 국내 지대 헌무부장 광복청년회 중앙본부 정훈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군창설 초창기 국방 경비대에 투신 육군사관학교 3기 특반군기학교 참모학교를 거처 육군 제5군단 1021사단장을 역임하다가 예편 재향군인회 상무부회장을 거치는동안 공의 족적은 험난했으나 많은 훈장과 독립유공표창으로 그 거룩한 뜻은 청사에 빛날 것이다. 공은 침착한 지략과 겸손한 마음으로 군사를 아꼈으므로 사람의 사력을 얻을 수 있었고 독립군에서 국군에 이르기까지 규율과 상벌과 준법에 엄정한 처사로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피에 얼룩진 군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