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성황리 640-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晩樵 南炳祐 先生 追慕碑(애국지사 만초 남병우 선생 추모비)
선생의 성은 남씨요 관향은 의령이며 자는 문견이고 호가 만초이며 휘는 병우이시다. 고려조 추밀원직부사로 의령군에 봉작되신 군보관조의 24세손이시며 입향조이신 양정준공이 11대조가 되신다. 휘 신지 휘 재린 휘 성문공이 고증조이시고 선고의 휘 상훈공은 무사하여 계후하고 선비는 달성서씨 유현공의 영교이시다. 가선대부 돈녕부도정을 지내신 휘 상욱공이 생고이시며 숙부인 영산신씨로 석지공의 영교이시다. 선생께서는 철종 기미(1859년) 음 5월 17일에 탄생하셨는데 천품이 돈후고매하시고 지효지독하셨다. 권세영화를 불모불사하셨고 예와 의를 숭봉하신 바 세인의 존앙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양정 제각 유허비 건립은 물론 후
학 양성 등 종사와 향당을 위하여 헌신진력하신 한편 일제 강점 초기 토지 수탈 정책의 추진과 함께 토지 세부 경계 측량을 실시하면서 강압적 만행을 자행하자 1914년 8월 26일 27일 양일간 당시 면장 남상순 공과 전중진 이진우 남차권 이일우 이정신 남종우 남찬우 공을 비롯하여 수백명의 면민을 동원하여 항쟁을 주도하신 바 소위 「정곡벌 난리」였다. 이 항일투쟁의 선도자로 지목되어 1914년 8월 29일 왜경에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셨고 결국 소요 및 공무집행 방해죄목으로 기소되어 1914년 10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를 받고 항소하여 191년 1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동일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고 출옥하신 뒤 악형의 후유증으로 누년 신고하시다가 조국 광복의 환희도 보시지 못한 채 1926년 1월 13일에 서거하시니 향년 67세이셨다. 배위는 담양전씨 경진공의 영교로 정숙단장하시고 효성과 부덕을 겸전하신지라. 동중의 칭송을 받으셨는데 을묘에 탄생하셨고 신유 음 2월 13일에 엽세하셨다. 슬하에 4남 4녀를 두시니 기도 기순 기문 기무공과 여서로 회산 황기수 함안 조동규 조성근 영산 신윤호 공을 맞이했으며 그 밑으로 많은 친외손을 두신지라 후손의 번연함은 선세의 음덕여광이리라. 선생의 덕업과 항일애국의 행적은 세월에 묻힌 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중 선생의 손 효현과 증손 택홍이 증거 자료 수집과 정부 당국에 청원을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서거하신지 74년만인 2000년 8월 15일 광복절에 항일운동 유공자로서 건국훈장 애족장(제3592호)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유훈유덕과 항일애국정신은 청사에 길이 남아 빛날 것이며 후예와 후진들에게는 영원한 사표로서 추앙받으실 것이다.
서기 2001년 8월 15일
의령문화원장 익성 허백영 삼가짓고
증손 택홍 삼가쓰다
현 자손록명(대소가 순서)
(자손) 규현 종현 우현 차현 철현 정현 지현 학현 이현 균현 숙현 효현 순현
(자손증) 택호 택양 택원 택술 택구 칭보 택수 택준 택홍 택정 택룡 택동 택석 택준 택래 택수 택종 택운 택조 택명 택순 택근 택문 택봉 택춘 택렬 택만 택균 택천
(자손현) 창식 준식 성준 경식 명식 연식 지훈 현철 충식 종식 효식 윤식 진식 영식 찬식 한식 영식 중식 근식 한산 호진 일식 인식 동현 정식 형식 동욱 대경 윤식 보석 지욱 대식 현식 현욱 인식
5대 종손 병욱(민철)
의령문화원장 익성 허백영 삼가짓고
증손 택홍 삼가쓰다
현 자손록명(대소가 순서)
(자손) 규현 종현 우현 차현 철현 정현 지현 학현 이현 균현 숙현 효현 순현
(자손증) 택호 택양 택원 택술 택구 칭보 택수 택준 택홍 택정 택룡 택동 택석 택준 택래 택수 택종 택운 택조 택명 택순 택근 택문 택봉 택춘 택렬 택만 택균 택천
(자손현) 창식 준식 성준 경식 명식 연식 지훈 현철 충식 종식 효식 윤식 진식 영식 찬식 한식 영식 중식 근식 한산 호진 일식 인식 동현 정식 형식 동욱 대경 윤식 보석 지욱 대식 현식 현욱 인식
5대 종손 병욱(민철)
경남 의령군 정곡면 성황리 494 애국지사 만초 남병우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애국지사 만초 남병우 선생 추모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42-1-15 / 관리자 : 문중대표
이 추모비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인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른 항일 독립운동가 남병우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02년 4월 28일 건립되었다. 경남 의령군의 경우 정곡면(正谷面) 중교동(中橋洞)의 동쪽 일대의 토지는 정곡면 죽전리(竹田里)·성황리(城隍里)·예둔리(禮屯里)·중교리(中橋里) 등 4개 동리의 주민들이 개간을 끝내고 지세(地稅)를 납부하며 경작해 오던 민유지(民有地)였다. 그러나 일제는 종래의 농촌관행을 무시한 채 이 지역을 인근의 토지와 함께 국유지로 편입하여 멋대로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하였고 1914년 8월에는 임시토지조사국원(臨時土地調査員)을 파견하여 해당지역의 측량을 강행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전중진(田中鎭), 남병우(南炳祐), 남상순(南相舜), 이진우(李震雨) 등은 토지 측량이 실시되면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어 조선농업주식회사의 관아로 이관되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것이 명백하므로 토지 측량을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700여 명의 주민을 집결하여 “해당 토지 측량은 동민의 권리를 무시한 압제의 작업이니 단연코 방해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하여 동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들은 8월 26, 27일의 이틀에 걸쳐 경찰관의 임석 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였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朴기陽)을 구타 응징하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남병우 선생은 이 일로 인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5년 1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관리번호 : 42-1-15 / 관리자 : 문중대표
이 추모비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인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른 항일 독립운동가 남병우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02년 4월 28일 건립되었다. 경남 의령군의 경우 정곡면(正谷面) 중교동(中橋洞)의 동쪽 일대의 토지는 정곡면 죽전리(竹田里)·성황리(城隍里)·예둔리(禮屯里)·중교리(中橋里) 등 4개 동리의 주민들이 개간을 끝내고 지세(地稅)를 납부하며 경작해 오던 민유지(民有地)였다. 그러나 일제는 종래의 농촌관행을 무시한 채 이 지역을 인근의 토지와 함께 국유지로 편입하여 멋대로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하였고 1914년 8월에는 임시토지조사국원(臨時土地調査員)을 파견하여 해당지역의 측량을 강행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전중진(田中鎭), 남병우(南炳祐), 남상순(南相舜), 이진우(李震雨) 등은 토지 측량이 실시되면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어 조선농업주식회사의 관아로 이관되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것이 명백하므로 토지 측량을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700여 명의 주민을 집결하여 “해당 토지 측량은 동민의 권리를 무시한 압제의 작업이니 단연코 방해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하여 동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들은 8월 26, 27일의 이틀에 걸쳐 경찰관의 임석 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였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朴기陽)을 구타 응징하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남병우 선생은 이 일로 인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5년 1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