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 순국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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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33-2
탐방로그
같은 장소에 안효제 선생 행적비, 안창제 선생 사적비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오호라! 한 독립운동가의 순국이 하필이면 조국광복의 꼭 2년전의 일일줄이야! 약관의 나이에 조국을 구하고자 기신 상경한 후 중국으로 노령으로 형극을 해치며 독립의 방략에 반주하다가 끝내 이역에서 순국하였으니 그 험난한 인생여정이 족히 40여 성상이었다. 독립운동가로서 종교인으로서 상해임정의 연락책으로서 단족리 상촌 건설의 민족지도자로서 민권운동 및 협동조합운동가로서 당신이 남기신 공훈은 이토록 혁혁하건만 당신에 대한 보은이 고작 1962년의 건국공로훈장 단장의 추서로 어찌 족할 수 잇으리요. 반만년 역사상 민족의 제단에 헌신한 선열이 어디 의사 한 분 뿐이랴만 망국지제에 조국을 되살리려는 님의 족적이 너무나 다채롭기에 마치 한 시대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사가로서의 감회가 자못 깊을 뿐이다.
서기 1993년 계유 월 일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박영석 근찬
백산 안희제 의사 순국기념비
백산 안희제 의사는 우리 민족이 근대의 격동기에 일제 침략자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강요당할때 오로지 대한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하늘이 내리신 분이다. 의사의 자는 태약이요 호는 백산이며 본관은 탐진이니 저 고려조에 성리학을 소개하여 이 땅에 의리와 명분을 밝게한 문성공 향과 그의 증손으로 탐진군에 피봉된 문렬공 원인이 바로 의사의 선조가 된다. 이런 연유로 일직이 안씨가에는 7효정의 미명이 원근에 떨쳤고 임진왜란때 망우당 곽재우와 더불어 창의하여 원종이등공신에 책록된 지헌공 기종 또한 의사의 10대조가 되니 살신구국한 의사의 충절이 어찌 우연이리요. 의사는 1885년 음8월 4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발공의 장남으로 고고의 성을 울렸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7세에 족형 익제공에게서 한문을 익힌 이후 발세에 문명을 더하여 약관에 이미 유림의 촉망을 받았으나 점차 쇠미를 더해가는 국운을 목도하고는 더이상 향촌유일로만 안주할 수 없었다. 21세되던 해인 1905년에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공포되자 비분강개하여 이미 나라가 망하고 따라서 백성도 망하는 것이 필연일 바에야 더이상 수구를 고집함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탄식한 후 홀연
상경하였다. 그 후 보성전문과 양정의숙 등에서 신학문에 심취하던 중 성재 이시영에게서 감화를 받아 의사의 우국애정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의사는 조국을 되살리는데는 교육이 급선무라는 확신 아래 구포에 구명학교 선녕에 선신학교 입산에 창남학교 대구에 교남학교를 세웠다. 25세때인 1909년에 망국이 목전에 다가오자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였고 이듬해에 드디어 국치를 맞게됨에 도산 안창호 의암 손병희 등과 회동하여 항일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27세에는 노령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갑 신채호 등을 만났고 최병찬과 함께 독립순보를 간행하였다. 그 후 의사는 뜻한 바 있어 30세에 귀국하여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던바 이 회사가 날로 번창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조달은 물론 상해임시정부의 비밀연락 창구역활을 맡았으며 특히 부산의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시민들은 백산상회는 시민의 회사요 백산 안의사는 부산의 주인공이다라는 칭송을 보냈다. 35세때에 3.1운동이 일어남에 족질 준상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 수만장을 배포토록 하는 한편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준재를 해외에 유학시켰다.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사 창립에 관여했고 그 후 중외일보도 인수하여 필전으로 왜정에 대항했다. 43세 때에는 백산상회 대신 자력사를 설립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선도하다가 47세 이후에는 만주 동경성 일대에 발해농장을 경영하여 교민의 생활을 안정시켰더니 세인들은 이곳을 단족리 상촌이라 불렀다. 또한 단군의 대도와 교화로 한민족을 단결시키고자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였는데 경전을 간행한 일이 화근이 되어 투옥되었고 58세 때에는 이극로가 대종교에 보낸 널리펴는 글이란 글이 조선독립선언서로 단정되어 교도들이 화를 입는 소위 임오참변이 일어남에 다시 투옥되었다. 9개월간 고문을 당하다가 출옥 3시간 만에 일본이 패망할 날이 임박하였는데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된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때는 1943년 9월 4일(음 8월 3일)로 향년 50세였고 의사의 유해는 그해음 9월 2일 고향 선영하 해좌원에 반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