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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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344-1
탐방로그
같은 위치에 산청 이동서당(면우곽종석유적)이 있고, 도보로 5분 거리에 곽종석의 생가, 기억의 방 2017 유림의 숲(한국유림파리장서비)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파리장서비 전국위치도]
서울 / 홍성 / 대구 / 거창 / 정읍 / 합천 / 밀양
면우 곽종석 선생이 준 파리장서를 제자 김창숙 선생은 수차례 정독후 몇군데 수정을 요청하자 면우 선생이 즉석에서 흔쾌히 수정하여 파리장서 원본을 확정했다.
면우 곽종석 선생은 파리장서를 한 줄씩 오려내어 짚신 날에 감추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가져가기에 편하도록 준비해 주었다.
1919년 3월 24일 만주(滿洲) 단동(丹東)에 도착한 심산 김창숙 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게 되었으니 삭발이 아깝겠는가? 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중국사람으로 위장하여 상해로 향했다.
1919년 5월 파리평화회의에 김규식 선생이 대한민국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 소했다. 파리장서 원문은 영문과 국한문으로 번역하여 3000부 정도를 인쇄, 파리평화회의 장과 각국대표, 외교기관 언론계와 국내 향교로 발송되었다.
13개조(個條)요구서
1919년 4월 3일 신한청년단이 한일강제병합과 일본의 부당한 주장이 근거 없음을 밝히는 내용으로 13개의 조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 독립기념관 제공
파리장서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평화회의에 면우 곽종석 선생 등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한 2674자 독립청원서
- 독립기념관 제공
파리평화회의 김규식 동정 호회
파리평화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 선생의 활동을 보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출판물
- 독립기념관 제공
선비의 고장, 산청 독립의 불길이 솟구치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펼쳤던 남명 조식 선생의 꼿꼿한 선비혼이 살아 있는 산청은 우국충정의 전통을 물려받아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던 고장이다. 기우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일어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의병들의 정신은 지리산의 웅혼한 기상처럼 산청을 감싸고 있다.
특히 산청은 파리장서 운동의 출발지였다. 전국 유림의 뜻을 하나로 모아 독립운동의 힘으로 결집시킨 면우 곽종석 선생의 출생지로서 유림 독립 운동의 중심이었다. 3·1운동은 산청과 신동, 단성에서 대규모로 일어났다. 오명진 투사는 민영길, 신영희, 오원탁, 최오룡, 신몽상 선생과 함께 산청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3천여 명의 군중이 운집해 산청 지역 최대 규모였던 신동과 단성의 3·1운동은 김영숙, 윤병모, 정태륜, 김상호, 권숙린, 김선림, 김상문 선생 등이 주도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의 의정원으로 활약한 윤현진, 김갑, 유경환, 이근한 선생도 대표적인 산청 출신의 독립투사이다.
산청청년회, 불교청년회, 단성청년회 등은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에 힘썼고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개최해 계몽활동에도 앞장섰다.
면우 곽종석 선생의 삶
면우 곽종석(1846.6.24 ~ 1919.8.24)
곽종석 선생은 1846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성리학 경전을 비롯한 역사서는 물론 정치, 제도, 군사, 의술 등 다양한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 영남의대 유학자인 한주 이진상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퇴계학을 계승해 한말 대표적인 유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 조약의 폐기와 조약 체결에 참여했던 을사오적을 처형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비분함을 달래지 못하고 은거하여 제자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3·1운동을 맞아 민족대표 33인에 유림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통분해 하던 중 독립을 염원하는, 유림의 뜻을 하나로 모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
이 독립청원서에는 현우 선생을 필두로 김복한 선생 등 유림대표 137인의 서명이 담겼고 제자 김창숙 선생에 의해 상하이를 거쳐 파리의 김규식에게 전달됐다. 파리장서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돼 대구 감옥에 수감되어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7월 19일 병보석으로 풀려 났으나 8월 24일 74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저서로 「면우문집」이 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면우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단성에 이동서당, 거창에 다천서당, 곡성에 산앙재가 세워졌다.
제2차 유림단 의거
유림의 독립운동자금 모금 운동
'제2차 유림단 의거'는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베이징과 서울, 경남 경북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금운동을 일컫는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우당 이회영 선생과 함께 내몽골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중국 정부로부터 토지 매입 허가를 받아냈다. 해외에 군사기지를 마련하고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제2차 유림단 의거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1925년 8월 국내에 잠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창숙 선생은 8개월에 걸쳐 국내 유럽과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때 모금된 군자금이 의열단원인 나석주 의사가 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의거에 쓰이면서 독립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제2차유림단의거는 일제의 회유에 독립운동의 열기가 식어가던 1920년대 중반, 새로운 독립운동의 길을 튼 전환점이었다.

김창숙 선생의 군자금 모금 여정
❶ 1925년 8월 서울로 잠입, 「신건동맹단」 조직
❷ 1925년 11월 대구로 내려가 독립자금 모금운동 독려
❸ 1926년 부산 범어사 금강암 등에 은신
❹ 1926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상하이로 탈출
❺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의거에 군자금 지원-
❻ 1927년 6월 10일 상하이 공제의원에서 체포, 국내로 압송됨
❼ 1928년 10월 19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14년형 언도, 대전형무소 수감
제2차 유림단 의거의 전개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25년 8월 베이징에서 서울로 잠입해 서울과 대구 등지를 오가며 전국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았다. 모금에 협조하지 않는 친일 부호들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해 비밀결사 조직인 「신건동맹단」을 조직하고 경기, 충청, 전라, 강원, 경상도에 동지들을 파견하였다.
제2차 유림단 의거는 김창숙 선생이 군자금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간 직후인 1926년 4월 송영우, 김화식 선생이 체포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8개월 동안 전국을 누비며 군자금을 모았지만 어느 누구도 발설하지 않았다. 심산 선생에 대한 유림의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제는 제2차 의림단의거와 관련 심산과 접촉했던 600여 명의 유림 인사들을 체포해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2차 유림단사건」 보도내용
경북유림단 사건으로 경북경찰국의 활동이 매우 비상하던 중, 지난 13일 경찰부의 긴급전보로 당시 경찰서 경관 5~6명은 즉시 성주군 월향면 대산동의 재산과 지위가 유림계에 굴지하는 이모, 동면 동동 이모 양씨의 집에 가택 수색까지 하였으나 별반 증거물은 얻지 못하였고, 전기 양씨는 동일 오후에 경찰부로 검거되었다더라. - 조선일보 1926.5.20일자
얼마전에 경북경찰국에 발각 검거된 경북유림단 사건은 그후 동경찰부에서 엄중한 취조를 받던 중 검거된 범인 수가 40~50명이나 되는 놀라운 수에 달하였으므로, 유치장이 협착하여 도저히 그대로 두고 취조를 할 수 없어서 우선 먼저 취조를 마친 10여 명만 지난 25 일 오전에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기었다는 바, 당일 동경찰부 내에는 범인들의 친척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더라. - 조선일보 1926.5.27일자
경상남북도를 위시하여 남부조선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유림들을 망라하여 세상의 이목을 경동하게한경북유림단 사건의 공판은 예정과 같이 10일 오전 11시 50분경에 대구지방법원 형사 제2호 법정에서 가네가와 재판장의 심리와 야마자와 검사의 입회로 개정하였는데, 피고가 열두 사람의 다수에 달하므로 그들의 가족, 친구 30여 명이 멀리 충청도와 경상남도 등지에서까지 와서 피고인들의 얼굴이라도 보고자 하였으며, 기타로 일반 방청인도 약 300명 가량이나 이른 아침부터 와서 기다렸던 바, 실제로 개정을 하게 되니 헌병대와 대구경찰서, 경북경찰국 등에서 정사복 경관 수십 명을 파견하여 물 한 방울 샐 틈 없이 엄중히 경계하고 방청인들도 신체를 수색하여 본 후에 입정하게 하였는데 그것도 법정이 혼잡하다는 핑계로 약 60여 명 가량 밖에는 입정을 허락치 아니하여, 일부러 수백리 먼 길을 왔던 가족들도 반수 이상이 방청치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는데 재판장은 피고들의 주소, 성명, 연령, 직업 등만 심리한 후 3월 3일로 연기한다 한 후 폐정하였다. - 조선일보 1927.2 12일자
경북유림단 공판, 15일로 또 연기, 본지에 누보한 바 경북유림단 사건 계속 공판을 3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개정할 예정이었는데 금번 이 사건의 기록은 ○○○ 2만 매 이상에 달하여 아직 이 사건 취급의 판·검사가 기록을 받아 보지 못한 관계로 부득이 오는 15일로 또 연기하였는 바, 이와 같이 기록이 많은 것은 대구지방법원 창설 이래 처음이라더라. - 조선일보 1927.3.4.일자
독립투사의 수감생활
수감자의 생활공간 - 수감자의 생활공간은 감방과 공장이었다. 수감자의 하루는 대부분 노역이었고 하루 30분의 운동시간이 주어졌다. 편지는 한 달에 한 번밖에 쓰지 못했다. 감방은 가장 넓은것이 13㎡ 크기였다. 이 같은 좁은 방에 40~50명을 수용하여 잠도 교대로 자야만 했다. 감방 내부에는 별도의 화장실이 없어 나무로 만든 통에 볼일을 해결하였다. 채광과 통풍이 되지 않았고 난방 또한 없었다. 여름철에는 더위와 각종 질병으로, 겨울철에는 추위와 동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병사하였다.
수감자의 식사 - 수감자의 밥은 콩 50%, 좁쌀 30%, 현미 20%의 비율로 하루 3회 배급되었다. 노역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세 끼를 모두 공장에서 먹었다. 밥의 양은 형량과 노역 강도에 따라 1~9 등급으로 나누어 배급하였다. 각 등급별로 깊이가 다른 원통형의 틀에 밥을 찍어 배급하였다. 이 때문에 감옥의 밥을 일본어로 틀이라는 뜻의 '가다'(型)를 붙여 '가다밥'이라고 불렀다.
비인륜적인 고문 자행 - 주리틀기, 못이 박힌 상자에 가두고 흔들기, 물고문, 손톱 밑 찌르기 등 70여 종의 비인간적인 고문이 독립투사들에게 자행되었다. 애국지사들은 이러한 위협과 고통 속에서도 꿋꿋한 지조를 보여주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혹독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면서도 웃으며 고문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림 159인

• 파리장서 서명 137인(서명순서)
곽종석 김복한 고석진 유필영 이만규 장석영 노상직 유호근
안병찬 김동진 권상문 김건영 김창우 신직선 김상무 김순영
이종기 권상의 고제만 서건수 곽수빈 유연박 하겸진 최학길
이경균 이석균 조현계 하봉수 이수안 하재화 하용제 박규호
우하교 김재명 변양석 고려진 이승래 윤인하 김봉제 박종권
윤철수 김택진 권상두 정태진 정재기 임한주 배종순 유진옥
허 평 박상윤 김지정 이인광 이학규 안종달 손상현 이이익
유준근 송홍래 송준필 성대식 이기향 이덕후 안효진 강신혁
전양진 이정후 노도용 김태린 김정기 송철수 문 용 송호완
송호곤 권명섭 이돈호 박정선 황택성 이상희 최중식 김양모
권병섭 권상원 고순진 김택주 정규영 송호기 이길성 송철수
박익희 송재낙 권상도 김병식 이능학 이현창 이수인 박 준
이봉희 박은용 정 근 백관형 전석구 송주헌 전석윤 김영식
김양수 김상진 장영구 이내수 조재학 김영찬 정재호 김덕진
손진창 손병규 김병식 이태식 이만성 이계원 이계준 우성동
김학진 우찬기 이병회 윤량식 김용호 이복래 곽 걸 우삼하
우경동 박순호 우승기 조석하 김동수 박재근 이진춘 이인규
이기정
• 2차 유림단의거 22인
김창숙 성태영 유진태 임경호 이중업 곽 윤 김 황 윤충하
윤중수 조중헌 이득년 김창택 이교인 이필호 배석하 안종묵
이 윤 최해윤 황일성 이영규 전용학 김정호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다고 해서 단성면 사월리를 찾았다.
면우 선생의 유허비가 있는 이동서당(尼東書堂) 바로 옆이다.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344-1
유림독립기념관
파리장서(동판모형)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편지
한국(韓國) 유림대표 곽종석(郭鍾錫) 등은 파리평화회의(巴里平和會議)에 관계하신 여러 훌륭하신 분들에게 삼가 글을 받들어 올립니다.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어 만물이 그 사이에서 함께 길러지고 있습니다. 크게 밝게 비쳐주고 큰 화육(化育)이 행해지니 그 도(道)를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쟁탈의 단서가 생겨나 강약의 형세가 나뉘어졌고, 병탄하는 권력을 쓰자 큰 것 작은 것의 형세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기 시작하여, 남의 목숨을 해치며 위협을 마음대로 부리고, 남의 나라를 훔쳐서 사사로이 소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천하에 이런 일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요? 지금은 하늘이 어진 그 무(武)를 내려서 천지의 마음처럼 받들게 하여 크게 밝은 바를 비추고 큰 화육(化育)을 행하여 천하를 하나로 만들어 대동(大同)의 세계로 돌이켜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본성을 이루게 해야 할 때입니다. 이에 만국이 동등하게 보고 천하가 한 가지 노선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혹 그런 소문은 들었지만, 그 실제적인 혜택을 얻지 못하여 억울하면서도 공정하게 알려지지 않게 된 것은, 어찌 여러 훌륭하신 분들의 마음 씀이 유독 여기서만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달리 이유가 있는지요? 그래서 피를 짜내고 가슴 속을 펼쳐 고개를 들고 하소연하는 것은, 지극히 애통하고 박절하여 그만둘 수 없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직 훌륭하신 여러분들께서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우리 한국은 실로 천하만국 가운데서 하나입니다. 강역(疆域)은 3천리고, 인구는 2천만입니다. 나라를 유지하여 온 지가 4천여 년인데 반도에 자리잡은 문명 있는 지역이 됨을 잃지 않았으니, 만국이 폐지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불행하게도 근년에 와서 강한 이웃 나라[일본]가 바깥에서 압박하여 억지로 맹약(盟約)을 맺었고 뒤이어 국토를 빼앗고 황제의 자리를 폐지하여 세계상에 우리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없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이 한 짓은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병자(1876)년에 강화도(江華島)에서 우리 나라 대신과 맹약(盟約)을 맺었고, 을미(1895)년에 청(淸)나라 대신과 마관(馬關)에서 조약을 맺었습니다. 모두가 우리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영원히 준수하는 것을 안건으로 삼았습니다. 계묘(1903)년에 러시아 선전포고할 때 여러 나라에도 통첩했는데, 거기에서도 우리 나라의 독립을 명확하게 선언하여 밝혔습니다. 이는 세계 민국이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온갖 책략과 사기를 만들어내어 안으로 위협하고 밖으로 속여 독립이 변해서 보호가 되고, 보호가 변해서 합병이 되었는데, 대한제국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원한다고 핑계를 대어 만국의 공정한 논의를 피하려고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손에는 한국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의 계산에는 만국도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 한국에서 한 짓이 공정한 의리를 손상함이 없고, 일본이 만국에 신의를 잃음이 없다고 만국의 대표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생각하고 계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의 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맨 손 맨 주먹으로 스스로 떨쳐 일어나 어떤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노래하고 읊조리고 영탄하면서 오히려 우리 임금님과 우리나라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그리며 "그래도 위에 있는 하늘이 우리를 돌보고 큰 운수가 잘 돌아올 것이니, 부끄러움을 끌어안고 참고 어려운 속에서도 엎어지고 자빠지며 지내온 것이 지금 10년이 되었습니다. 여러 훌륭하신 분들께서 평화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은 때로부터 우리 나라 백성들은 모두가 뛰며 격분하여 "만국이 평화를 누리게 된다면 우리 대한제국도 또한 만국의 하나인데, 어찌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얻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다시 폴란드 등 여러 나라는 모두 능히 독립을 했다는 것을 듣고서 또 다시 무리로 모여서 만세를 부르며 “평화회의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데, 저 나라는 어떤 나라며 우리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한결같이 보는 인(仁)은 또한 이러할 따름일 것이다. 하늘의 운수는 때가 되면 잘 돌아오는 것이다. 여러 훌륭하신 분들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이고, 우리들은 지금부터 우리 나라가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 도랑이나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다 해도 백골(白骨)이 장차 썩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부릅뜨고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머뭇머뭇 하는 사이에 하늘이 또 우리 나라를 동정하지 않아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우리 임금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온 나라가 흉흉하여 슬픔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무쳤습니다. 원통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자. 국장(國葬)을 치르는 날에 각 종교계와 단체, 개인 남녀가 독립만세 소리를 부르짖으며 우리 임금님의 영혼을 위로했습니다. 비록 일본이 포박하고 매질하고 죽이고 하는 일을 앞에서 번갈아 가했는데도, 맨손으로 앞 다투어 죽음으로 나가며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막히고 답답했던 마음이 오래 쌓이면 반드시 배출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여러 훌륭하신 분들께서 그 기회를 열어주고 그 용기를 북돋아 주신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적미적하다가 세월이 오래 되었건만 아직도 확실하게 처리한 것은 볼 수가 없는 동안에 또 한편으로 의심하면서 한편으로 놀랬습니다. 우리 나라가 의사를 전달할 수 없게 되자, 중간에서 힘을 쓰는 사람이 이랬다저랬다 술수를 꾸며 훌륭하신 여러분들의 보고 듣는 것을 미혹하게 하였으니. 다시 분변하여 밝히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 반드시 각각의 물건에 능력을 부여했습니다. 작은 것으로는 물고기나 조개나 곤충 등도 모두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진실로 그 자신이나 그 나라를 다스릴 능력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 한국이 비록 작으나 둘레가 3천리이고 인구가 2천만인데, 4천년을 지나오도록 능히 우리 한국의 일을 담당해 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어찌 이웃 나라[일본]가 대신 다스려주는 것을 기다렸겠습니까? 거리가 1 천리가 되면 분위기를 같이하지 않고 1백리가 되면 풍속이 같이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 일본은 우리 한국이 능히 독립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저들의 다스리는 방식으로 우리 한국의 풍속에다 덮어씌우지마는 풍속은 갑자기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본이 다스린다는 것은 단지 우리 나라를 어지럽히는 계기가 될 뿐입니다. 이는 시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 일본이 만국공회에서 말하기를, "한국 백성들이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에 붙기를 원한 지 오래 되었다"라고 합니다. 한국 백성들이 한국 백성이 된 것은, 그 영토와 풍토가 이미 정해졌을 뿐만 아니, 천성에서 얻은 것이 그러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차라리 잠시 굽혀서 위협하는 권력을 받을지언정 그 마음은 실로 장차 천백 년을 지나도록 한국 백성 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본심의 존재를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갑자기 속일 수 없는 것인데도, 일본은 만국이 모두 폐기한 위세와 권력을 가지고 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한 목소리의 공론을 압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본 자신에게 있어서도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종석(鍾錫) 등은 산야에 버려진 쓸데없는 존재라서 외국의 일을 상세히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옛 나라의 신하로서 돌아가신 임금님의 남긴 풍속에 따라서 유교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온 세계가 새롭게 되는 때를 당하여 나라가 있고 없고가 이번 한 차례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나라가 없으면서 사는 것은 나라가 있으면서 죽는 것만 못합니다. 치우친 구석에서 스스로 말라죽는 것이 공정하게 듣고 아울러 보는 곳에다 몸을 바치는 것과 어찌 같겠습니까? 울적한 심정을 한번 알려 여러분들의 조처를 기다립니다. 우리 나라와 평화회의가 열리는 파리 사이는 바다와 땅이 멀리 떨어져 있고 국경 관문에서 막는 것이 엄하고 급하여 발을 싸매고 갈 수가 없고, 급히 소리쳐도 들릴 거리가 아니니, 조석에 달린 목숨은 길에서 엎어져 죽어도 구제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런 생각을 길이 나타낼 희망도 없습니다. 비록 훌륭하신 여러분들의 신성하고 총명함으로서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어둡고 답답한 우리 한국의 사정에 생각이 반드시 미치리라는 것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짧은 글을 지어 마음을 같이 하는 말을 모으고 십년 동안 살면서 받은 실정을 갖추어 하늘끝 만리 바깥에 인편으로 보내는 바입니다. 진실로 슬픔이 매우 북받쳐서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여러 훌륭하신 분들께서는 불쌍히 여겨서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공정하게 판단한 논의를 더욱 확대하여 크게 밝게 비춤이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게 하고, 큰 교화(敎化)의 시행함을 순조롭지 않음이 없게 하시면, 종석(鍾錫) 등은 나라가 없지만 나라가 있는 것처럼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 시대에 도덕적으로도 매우 다행한 일이고, 여러 훌륭하신 분들의 해야 할 일도 정말 마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종석 등은 차라리 목을 함께 모아 죽음으로 나아갈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2천만의 생명이 유독 천지가 길러주는 의 바와 관계가 없으며, 가지처럼 뻗어나기는 화합된 기운에 유감이 없겠습니까? 오직 훌륭하신 여러분들은 이 일을 추진하소서.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된 그 말씀
곽종석 – 나는 살아서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여기에 왔다. 왜 종신 징역을 선고하지 않고 하필 2년이냐. 내가 공소할 곳은 하늘밖에 없다.
김창숙 –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는가.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내 혁명에 불타는 마음은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김복한 –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나석주 –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儒林[유림] / 유림의 독립운동
선비들은 국운이 기울자 비분강개하여 책을 덮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침탈에 대항하거나 망명길에 올라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망국의 통한을 증명한 선비도 있었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교육과 애국 계몽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5백년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온 유림은 굳센 지조로 대한 독립의 길을 꼿꼿이 걸어갔다.
● 1905 –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유림들의 상소문
● 1907 – 대마도에서 단식 순국한 최익현 선생(1883~1907)
● 1910 – 망국의 통한을 이기지 못해 자결한 황현(1885~1910), 홍범식(1871~1910) 선생

⦁ 1870 - 1871 신미양요, 1876 강화도 조약 체결, 1876 일본에 수신사 파견
⦁ 1880 – 1881 일본에 신사유람단 파견, 1882 임오군란, 1883 미국에 최초로 대표단 파견, 1884 갑신정변
⦁ 1890 – 1894 동학농민운동, 1894 청일전쟁, 1895 을미사변, 1986년 독립협회 결성, 1897 대한제국 국호 변경
⦁ 1900 – 1904 러일전쟁, 1905 을사늑약, 1906 최익현 선생 단식 순국, 1907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 파견, 1909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 장인환 의사 스티븐스 저격
● 1919 파리장서운동(제1차 유림단 의거) - 1919년 경상도, 충청도 유림들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 조국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려다 일본에 발각되어 많은 유림들이 옥고를 치른 유림독립운동 / 곽종석 선생, 김복한 선생, 장석영 선생
● 1925 독립자금 모금 운동(제2차 유림단 의거) - 1925년부터 1927년 사이에 베이징과 서울, 그리고 경남북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 운동 / 김창숙 선생
● 1929 나석주 의사 의거 – 1926년 12월 28일 유림들이 모은 군자금으로 의열단원인 나석주 의사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한 의거 / 나석주 의사, 조선식산은행

⦁ 1915 – 1911 신흥무관학교 설립, 1919 2·8 독립선언, 1919 3·1독립만세운동, 1919 파리장서 운동,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1920 – 1920 청산리 대첩, 1926 6·10만세운동, 1929 광주학생운동
⦁ 1930 – 윤봉길의사 홍구공원 폭탄 투척, 1937 군사위원회 설치, 1940 한국광복군 창설
⦁ 1945 – 1945 8·15 광복, 1948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내정세와 항일 운동 (3·1운동 이전)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양위하기까지의 32년 간은 조선 500년을 통해 가장 극심한 국난기였다.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혁명과 청일전쟁(1894), 을미사변(1895), 러일전쟁(1904), 을사늑약(1905) 등 국내·외 정세는 조선 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다. 1910년 강제로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1919년 3·1운동 전까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무단통치로 우리 민족의 숨통을 막았다.
[1870] 1871 신미양요 / 1876 강화도 조약 체결 / 1876 일본에 수신사 파견
[1880] 1881 일본에 신사유람단 파견 / 1882 임오군란 / 1883 미국에 최초로 대표단 파견 / 1884 갑신정변
[1890] 1894 동학농민운동 / 1894 청일전쟁 / 1895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 1896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협회 결성 / 1897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고종 황제 즉위)
[1900] 1904 러일전쟁 / 1905 을사늑약 / 1905 장지연, 〈황성신문〉에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 1905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으로 부임 / 1906 통감부 설치 / 1906 최익현 선생 단식 순국 / 1907 정미7조약 체결 / 1907 국채보상운동 전개 / 1907 한국군 강제 해산 / 1907 비밀정치결사 신민회 조직 / 1907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 / 1907 헤이그 특사 파견을 계기로 고종황제 퇴위 / 1907 순종,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즉위 / 1900 기유각서(사법권·경찰권 박탈) / 1909 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 1909 이재명 의사 이완용 습격 / 1909 장인환 의사 스티븐스 저격
[1910] 1910 한일강제병합 (국권피탈) / 1910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 설치 / 1911 신흥무관학교 설립 / 1911 105인 사건 / 1919 고종 덕수궁에서 승하 / 1919 2·8독립선언 / 1919 3·1독립만세운동 / 1919 파리장서 운동 /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파리장서의 여정
∎ 1919년 4월 : 독립청원서를 영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하여 국내외에 발송(파리에 주재하고 있던 김규식에게 우송) / 파리평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선생
∎ 1919년 3월 23일 : 김창숙 선생이 안동과 봉천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 / 김창숙 선생이 유림 대표로 상하이에 망명하였다고 보도한 동아일보(1921.10.1.)
∎ 1919년 3월 21일 경 : 충청도 유림 대표 임경호 일행과 회동, 경상·충청 유림 137인의 서명이 담긴 최종 독립청원서 완성 / 전국 유림대표 137인이 서명한 독립청원서(파리장서)
∎ 1919년 3월 16일 : 곽종석 선생과 김창숙 선생이 독립청원서를 수정, 김창숙 선생을 파리로 파견하기로 결정
∎ 1919년 3월 15일 : 김창숙 선생이 곽종석 선생을 만나 독립청원서 작성 등을 협의 / 곽종석 선생과 김창숙 선생이 협의하는 모습
∎ 1919년 3월 8일 : 재경 유림들이 회합하여 곽종석 선생을 대표로 추대함
∎ 1919년 3월 6일 : 심산 선생이 곽윤, 김황을 만나 그간 사정을 곽종석 선생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독립청원서 작성을 부탁
∎ 1919년 3월 1일 : 심산 김창숙 선생 등이 3·1운동을 목도하고 파리에 유림 대표 파견을 계획 / 3·1운동
∎ 1919년 2월 19일 : 곽종석 선생이 독립청원서 작성을 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