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규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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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경남 밀양시 부북면 용지리 산 82-1
탐방로그
밀양시청 서문사거리에서 밀양시 산불대응센터로 향하는 도로 초입(횡단보도 바로 앞)에 위치한 안내판을 따라가면 쉽게 탐방할 수 있다. 같은 장소에 황상규의 묘가 있다.
백민 황상규는 김원봉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안내문이 넘어져있었다.
밀양시청 서문사거리에 안내판이 있다.
밀양시 교동 1125-12 밀양종합운동장 테니스경기장 앞에서 묘 안내판도 발견했다.
애국지사 황상규 선생 묘지 안내판
(위치 : 밀양시 부북면 용지리 산 82-1번지) - 200m 전방 -
중간중간에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어느 쪽일까 고민하던 차에,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 비석이 보였다.
지금 이 지점의 GPS 상의 주소는 밀양시 부북면 용지리 96-2이다.
嘉善大夫黃公之묘(가선대부 황공지묘)
公諱三得. 황씨성씨라서 혹시나 싶었는데, 이곳은 아니다.
조금 전 묘소의 위쪽에 안내판이 보였다.
애국지사 황상규선생의 묘
이 곳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인 백민 황상규(1891.4.19~1931.9.21)선생께서 모셔져 있는 묘소이다. 선생은 대한제국기 집성학교를 졸업한 다음 마산에 창신학교, 밀양에 상동고명학교를 설립하였다. 고명학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 이란 역사교재를 저술하였다. 또 동화학교를 인수하여, 청년학도 200여명을 배출하였다. 1918년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였다. 북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재정을 담당하였다. 1919년 2월 해외독립운동진영의 지도자들이 연명으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정의군정사의 회계책임 일을 맡기도 하였으며, 1919년 11월에는 김원봉등 밀양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의열단 결성을 지도하였다. 1920년 5월 13일 의열단의 임제침략기관 폭파및 부일배 처단의거 계획에 따라 곽재기등과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대상을 물색하던중 일제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같은 해 6월 체포되었다. 1921년 7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1926년 출옥한 후에는 신상활사를 설립하였고 1927년 10월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장, 1927년 12월 신간회 밀양지회장, 1928년 3월 밀양협동조합 위원, 1927년 7월 신간회 중앙서기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1931년 9월 2일 사망할 때 까지, 노동야학과 여자야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백민 황선생 상규지묘
사회단체연합장 1931년 9월 6일 하동주 근서
독립선구자 백민 황상규 선생 추모비
여기 말없이 잠드신 분은 평생을 조국광복에 바치신 애국지사 백민 황상규선생이시다. 선생은 국운이 어지럽던 1891년 4월 19일 밀양읍 내이동에서 황문옥님의 독자로 출생하여 일찍부터 상동 밀양 마산에 학원을 열어 국국의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이시는 한편 몸소 동국사감을 지어 주체의식을 고취하시더니 1917년 만주 길림으로 망명 비밀리에 일합사를 결사 18년 무오독립선언에 39인 대표의 한분으로 서명 활동하시고 임정수립에 참가 3.1운동 후에는 북로군정서를 창설 재정책임자로 군자금 조달에 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무력행동대인 의열단을 조직 초대 의백(단장)으로 일제 중요 기관 파괴 요인암살 공작을 계속하시다가 7년 장기징역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후 다시 독립운동의 총집결단체인 신간회 중앙서기장의 중책을 맡는등으로 불굴의 항일운동을 계속하시더니 일제의 겹친 박해와 옥고로 31년 9월 2일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개인이 영예를 돌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몸바치신 선생의 위업을 오늘 우리들의 교훈으로 되새겨지고 기리 후손들에게 현양되어야 할 것이다.
1975년 11월 17일
애국지사 백민 황상규선생 추모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