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

4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65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 4단계 태극기 - 1990년 대한제국은 프랑스의 초청을 받아 파리만국박람회에 참가해 대한제국이 독립국가일을 서구 열강들에게 알리고자 했는데 특파대사는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이었다. 파리 박람회 한국관 앞에 게양하였던 태극기이다. 특징으로는 유연한 곡선의 음방(청색)과 양방(홍색)이 좌우로 배치된 것과 4개가 귀퉁이에 있지 않고 열십자방향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 5단계 태극기 -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 공표한 대한민국 국기. 지금의 태극기 도안이 되기까지는 42인의 국기시정위원회와 수차례 의논과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결정되었다. 당시 이왕에 해방과 함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엿으니 국기도 새로운 도안으로 만든 것이 어떻겠는가는 논란이 가장 두드러졌으나, 일제 36년동안 일본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조국의 광복을 빌었으니 그분의 넋을 달래고 또 갈라진 남북이 통일되면 한반도 전체의 의견이 수렴된 국기를 만들 기회가 있으니 도안과 4괘의 이치가 다소 논란이 있더라도 일제 36년동안 가장 많이 그려지고 사랑하였던 현재의 태극 도안대로 국기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조선의용대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에서 김원봉에 의하여 창립된 한인독립군 무장부대이다. 구성원은 총대장인 김원봉과 정치조훈련주임이었던 윤세주를 비롯해 150여명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전투, 일본군정의 탐지 또는 점령지역내의 정보수집 등 다양하였다. 윤세주는 1941년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화북지역으로 북상하여 팔로군과 공동으로 항일전투에 참가했다. 김원봉은 1942년 7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장에 취임하였고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맨 앞줄 왼쪽부터 이익성, 두사람 건너 박효삼, 다시 두사람 건너 최창익, 한사람 건너 석정(윤세주), 이집중, 김원봉 총대장이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꼭 탐방하고 싶은 곳 중 한 곳인 중국 산서성의 조선의용대 사적지

조선의용대 두번째 주둔지인 중국 산서성 좌권현 마전진 운두저촌의 성문 동쪽에 동제를 지내는 당집누각 벽면에 씌여진 항일선전구호, 조선의용대가 일본군부대에 학도병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무공작을 펴기 위해 만든것으로,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었던 조선의용대를 기리기 위해 페인트칠을 계속하며 70년 넘게 촌민들에 의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
내일동은 많은 애국지사분들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가 조성되어 있었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

그날의 함성이 들려온다
밀양아 해천아 글판
밀양에서는 8번의 만세운동이 있었습니다!
1919년 밀양장날(3/13), 밀양공립보통학교(3/14), 유림만세(3/15), 안희원장례(3/20), 밀양소년단(4/2), 단장면만세(4/4), 부북면만세(4/6), 청도면만세(4/10)
예전 탐방시에는 복개되어 있었는데, 다 뜯어내어 새롭게 단장을 했다.
● 해천 항일운동테마 거리 ● 이곳 해천 지역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곳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스토리텔링화하여 항일운동 테마거리로 조성되었습니다. 해천 지역은 백민 황상규 선생의 생가지, 일본 김대지 선생의 생가지도 지척에 있으며,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옥고를 치르신 권잠술, 홍재문 두 분 선생과 김병환 선생, 윤치형 선생, 약산 김원봉 선생, 고인덕 선생, 석정 윤세주 선생, 강인수 선생 등도 해천 주변에서 태어나시고 어린시절을 보내셨습니다. 특히 김원봉, 윤세주 선생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3.13만세 운동과 밀양인의 항일운동에 관련한 기록들을 벽화와 조형물 등으로 제작하여 누구나 쉽게 항일운동을 이해하고 숭고한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의 장이 될 것입니다.
● 1919.3.13 그날의 함성이 들려온다 ●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이 일어났던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운동에 참가한 윤세주 선생은 만세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 밀양에 돌아와 동지들을 모아 3월 13일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합니다. 밤을 세워가며 동사판으로 수백장의 독립선언서를 찍었고 부녀자들은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13일 오후 1시 무렵 수천명이 모인 고향 장터에서 윤세주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동지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를 주시하고 있던 일제는 당장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을강 전홍표 동화학교 교장선생님의 지도로 3.13 밀양만세 의거를 주동하신 수많은 선열들의 함성과 그 외침소리가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 1단계 태극기 -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1882년에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을 방문할 때 고종황제로부터 허락 받은 대로 배안에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있으나 당시 그렸다는 태극기 모습이 나타나지 않아 애를 태웠으나 태극기연구가 송명호(시인, 필명 송명)씨가 115년만에 일본 동경도립중앙도서관에서 조선에 처음으로 국기가 만들어졌다는 기사와 함께 태극기 그림이 실린 시사신보(1882.10.2.월요일)를 발견, 이 사실을 1997년 8월 15일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115년만에 그 발자취를 찾아내게 되었다. 괘의 모습은 현재의 태극기와 상당히 다르고 음방과 양방의 배치도 좌우 대칭되어 있다.
● 2단계 태극기 -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Owen N. Denny, 1838~1900)가 1890년 5월 청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어 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던 것으로, 1981년 기증받아 현재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태극기에는 제작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를 거는 끈이 오른쪽에 남아있어 태극기의 오른쪽을 국기봉에 매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던 전통 습관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 태극기의 태극은 당시 만들어진 태극기와 비교해보면 혹시 태극을 뒤집어서 박음질 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 3단계 태극기 -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최초의 의사였던 서재필 박사에 의해 발간된 독립신문 제호에 실린 태극기. 당시 독립신문의 제호 태극기는 발행될 때마다 그 모양이 달랐는데 아마도 태극기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괘의 위치도 지금과는 아주 다르며 정사각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