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호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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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209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창남 윤병호 선생 년보
1889 경남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서 윤태의와 최호영 4남 2여 중 4남으로 출생
1908 향리의 선각자였던 중형 윤도청의 권유 및 지원으로 종형 경방 족질 계석과 함께 서울 보성전문학교에 유학
1909 보성중학교 교장 박중화 및 남형우 안희제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목적으로하는 비밀결사단인 대동청년회 조직
1911 보성전문학교 졸업
1915 와세다대학 졸업 귀국 윤상태 서상일 등과 단군 봉사를 목적으로 조직한 국권회복단 가담
1919 백산무역주식회사 설립 안희제 윤현태 등과 함께 취체역 피선
1919 3.1독립운동에 즈음해 국권회복단 동지들과 진동 헌병주재소 습격
1919 독립운동 인재양성을 위한 기미육영회를 조직, 간사에 피선. 안호상 이극로 등을 기미육영회에서 구미 각국으로 유학 피선
1920 3.1운동 1주기를 맞아 창건한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
1929 조선어학회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
1942 조선어사전편찬회 참가하였다가 일제가 조직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함흥감옥에서 1년여 옥고를 치름
1946 광복 후 경상남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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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창남 윤병호 선생 년보
1889 경남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서 윤태의와 최호영 4남 2여 중 4남으로 출생
1908 향리의 선각자였던 중형 윤도청의 권유 및 지원으로 종형 경방 족질 계석과 함께 서울 보성전문학교에 유학
1909 보성중학교 교장 박중화 및 남형우 안희제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목적으로하는 비밀결사단인 대동청년회 조직
1911 보성전문학교 졸업
1915 와세다대학 졸업 귀국 윤상태 서상일 등과 단군 봉사를 목적으로 조직한 국권회복단 가담
1919 백산무역주식회사 설립 안희제 윤현태 등과 함께 취체역 피선
1919 3.1독립운동에 즈음해 국권회복단 동지들과 진동 헌병주재소 습격
1919 독립운동 인재양성을 위한 기미육영회를 조직, 간사에 피선. 안호상 이극로 등을 기미육영회에서 구미 각국으로 유학 피선
1920 3.1운동 1주기를 맞아 창건한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
1929 조선어학회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가입
1942 조선어사전편찬회 참가하였다가 일제가 조직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함흥감옥에서 1년여 옥고를 치름
1946 광복 후 경상남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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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독립지사 윤병호 선생의 비' 이다.
독립지사 윤병호 선생의 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43-1-39호 / 소재지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노량공원 내)
창남(滄南) 윤병호(尹炳浩: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은 1889년 8월 5일 경남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서 출생하여 보성전문학교 수학 중 1909년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3.1운동 직후에는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국내외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기관인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관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애국청년들을 민족간부로 양성하기 위하여 안희제와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청년들을 인재로 양성하였고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 朝鮮語學會의 前身)가 조선어사전 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를 조직하자 가입하여 사전 편찬사업에 참가했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글학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의 옥고를 겪다가 1974년 7월 13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임종하셨다.
구한말 일제 침략으로 민족적 국운이 기울어진 때 이 고장에서 태어나 항일운동으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위인이 있으니 바로 창남 윤병호 선생이시다. 자는 택현 호는 창남 본관은 파평이고 1889년 8월 5일 이 고장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서 출생 1908년 민족학교인 보성전문학교에 진학 자유 정의 진리의 교육을 받으면서 나라를 되찾고자하는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으며 독립운동의 이론을 탐구코자 도일 조도전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유학 1915년 졸업과 동시 귀국 단군봉사를 통하여 구국하기 위한 국권회복단조직에 가담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목적으로하는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 운영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국권회복단 동지들과 경남 창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진동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는가 하면 1920년 동아일보 창간발기인 1929년 조선어연구회 가입 등 언론과 조선어로 민족운동에 활약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함흥 감옥에서 1년여 옥고를 치렀다.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도 지극하여 1947년 재부산남해향우회를 창립하여 회장을 10대까지 연임하였고 1954년 고향 남해에서 무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국회호헌지회의 대표간사로서 이승만대통령의 삼선 개헌에 반대하는 깃발을 들고 서울 가두시위에 앞장서 독재정권을 막는 민권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민주당경상남도당위원장과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그 장대한 체구 영청 옥결 같은 고귀한 용모 선각자의 인품과 기개 등 이곳 향토가 낳은 혜성같은 위대한 애국지사로 숭앙받다가 1974년 7월 13일 향년 86세로 생을 마감하여 향리에 영면하셨다. 조국과 후세에 남긴 선생의 빛나는 독립유공가 애향심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남해인의 온 마음을 모아 3.1 독립만세의 함성이 있은지 80년 째가 되는 이날을 기하여 남해의 관문인 노량공원에 이 비를 세우다.
김일두 글을 짓고 1998년 3월 1일 독립지사 윤병호 선생의 비 건립위원회 회원 일동이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