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19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획을 세워 지방인사와 굳게 손을 잡고 널리 동지의 협조와 당국의 원조를 받아 육년동안 병구를 이끌고 불철주야 불피풍우의 노력과 물심양면의 공헌으로 오늘의 이석조전의 위관을 이루게 되었음은 실로 선생의 공적이라. 이에 비에 새겨 길이 후세에 빛내고저 하는 바이다.
단기 사천이백팔십팔년 십일월 십이일 세우다.
단기 사천이백팔십팔년 십일월 십이일 세우다.
획을 세워 지방인사와 굳게 손을 잡고 널리 동지의 협조와 당국의 원조를 받아 육년동안 병구를 이끌고 불철주야 불피풍우의 노력과 물심양면의 공헌으로 오늘의 이석조전의 위관을 이루게 되었음은 실로 선생의 공적이라. 이에 비에 새겨 길이 후세에 빛내고저 하는 바이다.
단기 사천이백팔십팔년 십일월 십이일 세우다.
단기 사천이백팔십팔년 십일월 십이일 세우다.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192-1 경남해양과학고등학교 교문안 왼쪽 하전 이상태(李相兌) 선생 기공비를 찾아왔다.
이상태 기공비 옆에 철암 하창수 교장 기공비가 있었다.
하창수 교장은 본교에 재직하면서 일제강점기 중에는 항일 교육에, 광복 후에는 민주 교육에 헌신하였다고 한다.
하창수 교장은 본교에 재직하면서 일제강점기 중에는 항일 교육에, 광복 후에는 민주 교육에 헌신하였다고 한다.
하천 이상태 선생 기공비
선생은 일찍이 민족을 사랑하고 교육을 장려하면서 산업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시더니 삼일운동때는 임시정부와 깊은 관계를 가지시어 국내의 요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왜정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시지 못한 채 오래동안 영요의 고초를 받으셨고 민생 경제에 깊은 뜻을 쓰시어 특히 수산업 발전에 큰 공을 남기시었고 만년에 이르러 수산학교를 이전 신축하자 궁핍한 재정으로 원대한 계
선생은 일찍이 민족을 사랑하고 교육을 장려하면서 산업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시더니 삼일운동때는 임시정부와 깊은 관계를 가지시어 국내의 요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왜정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시지 못한 채 오래동안 영요의 고초를 받으셨고 민생 경제에 깊은 뜻을 쓰시어 특히 수산업 발전에 큰 공을 남기시었고 만년에 이르러 수산학교를 이전 신축하자 궁핍한 재정으로 원대한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