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 355-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대한예수교장로회, 진주남노회 남해읍교회
당회장 정동호 목사, 기증자 김선일 원로장로
당회장 정동호 목사, 기증자 김선일 원로장로
최상림 목사 신사참배 거부 순교비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 355-3 남해읍교회 입구 최상림 목사 순교비를 찾았다.
최상림 목사 순교비
최상림 목사 순교비
최상림 목사는 1888년 11월 27일 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결혼 후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십리길이 넘는 기장읍교회에 도보로 출석하시다가 이듬해 고향에 죽성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의 길에 나선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30년에 남해읍교회에 부임하여 남해군 복음화를 위해 전도 집회를 하시며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했다. 1938년부터 일제의 신사 참배 바람이 거세어지자 그 당시 경남노회장이었던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신사 참배를 반대하며 노회를 해산시켜 전국 노회 중 유일하게 신사 참배를 가결하지 않는 노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길로 연행되어 형무소에 수감되기를 49회나 하면서 옥고에 시달리다. 광복을 눈 앞에 둔 1945년 5월 6일 새벽 3시에 평양형무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평생을 주님의 뜻을 받들며 정의와 겸손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다가 순교하신 최상림 목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남해읍교회 교우들이 순교의 비를 세운다.
1998년 5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진주남노회 남해읍교회
최상림 목사는 1888년 11월 27일 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결혼 후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십리길이 넘는 기장읍교회에 도보로 출석하시다가 이듬해 고향에 죽성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의 길에 나선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30년에 남해읍교회에 부임하여 남해군 복음화를 위해 전도 집회를 하시며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했다. 1938년부터 일제의 신사 참배 바람이 거세어지자 그 당시 경남노회장이었던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신사 참배를 반대하며 노회를 해산시켜 전국 노회 중 유일하게 신사 참배를 가결하지 않는 노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길로 연행되어 형무소에 수감되기를 49회나 하면서 옥고에 시달리다. 광복을 눈 앞에 둔 1945년 5월 6일 새벽 3시에 평양형무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평생을 주님의 뜻을 받들며 정의와 겸손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다가 순교하신 최상림 목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남해읍교회 교우들이 순교의 비를 세운다.
1998년 5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진주남노회 남해읍교회
최상림 목사 순교비
최상림 목사는 1888년 11월 27일 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결혼 후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여 십리길이 넘는 기장읍교회에 도보로 출석하시다가 이듬해 고향에 죽성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의 길에 나선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30년에 남해읍교회에 부임하여 남해군 복음화를 위해 전도 집회를 하시며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했다. 1938년부터 일제의 신사 참배바람이 거세어지자 그 당시 경남노회자이었던 그는 죽으면 묵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노회를 해산시켜 전국 노회중 유일하게 신사참배를 가결하지 않는 노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길로 연행되어 형무소에 수감되기를 49회나 하면서 옥고에 시달리다. 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5월 6일 새벽 3시에 평양형무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평생을 주님의 뜻을 받들며 정의와 겸손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다가 순교하시 최상림목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남해읍교회 교우들이 순교의 비를 세운다.
최상림 목사는 1888년 11월 27일 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결혼 후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여 십리길이 넘는 기장읍교회에 도보로 출석하시다가 이듬해 고향에 죽성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의 길에 나선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30년에 남해읍교회에 부임하여 남해군 복음화를 위해 전도 집회를 하시며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했다. 1938년부터 일제의 신사 참배바람이 거세어지자 그 당시 경남노회자이었던 그는 죽으면 묵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노회를 해산시켜 전국 노회중 유일하게 신사참배를 가결하지 않는 노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길로 연행되어 형무소에 수감되기를 49회나 하면서 옥고에 시달리다. 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5월 6일 새벽 3시에 평양형무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평생을 주님의 뜻을 받들며 정의와 겸손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다가 순교하시 최상림목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남해읍교회 교우들이 순교의 비를 세운다.
최상림 목사 신사참배 거부 순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