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458-1
- 탐방로그
- 본 안내판은 철원군·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 2018년 1월에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458-1 화지5리 마을회관 앞에 세웠다. 박건병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생가는 멸실되어 터만 남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458-1 마을회관 앞에 있는 애국지사 박건병 선생 생가터 표지 안내판을 찾았다.
독립운동가 박건병 선생 생가터 안내판이 있다.
독립운동가 박건병 선생 생가터
주시경의 제자로서 국어학자이자 철원 출신 독립운동가인 박건병(필명:맹천)은 철원군 동송읍 도피안사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의 군단조직인 철원애국단을 창설하는 데 참가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김상덕이 주동하여 조직한 애국단에서 학무과장을 맡았으며 이어서 강원도 도단부를 설치하는 데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애국단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제2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0월 10일 철원 사요리 우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될 때, 오세덕과 더불어 군중들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태극기 게양과 인쇄물 배포 등을 주도하였다. 이 시위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였고, 1920년 1월 임시의정원 의원(강원도 대표)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4월 20일 북경에서 열린 군사통일주비회에 하와이 독립단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상해로 가서 국민대표회의를 준비하다 1923년 1월부터 5월 말까지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북경지역 대표로 참석, 창조파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큰 결실이 없이 끝났다. 1926년 안창호와 원세훈 사이에 제독립단체들의 역량을 결집,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 본토에서 민족 협동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유일당운동이다. 첫 결실로 1926년 10월 16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결성되었고, 맹천 선생은 이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장건상 등 6명과 더불어 집행 위원이 되었다. 이어서 상해, 남경, 광동, 무한 등에서도 유일독립당촉성회가 속속 결성되었고, 1927년 11월 9일에는 이들 다섯 지역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맹천은 이 연합회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해인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만주 화전과 반석에서 개최된 전민족 유일당 조직회에 참석하여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 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주시경의 제자로서 국어학자이자 철원 출신 독립운동가인 박건병(필명:맹천)은 철원군 동송읍 도피안사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의 군단조직인 철원애국단을 창설하는 데 참가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김상덕이 주동하여 조직한 애국단에서 학무과장을 맡았으며 이어서 강원도 도단부를 설치하는 데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애국단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제2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0월 10일 철원 사요리 우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될 때, 오세덕과 더불어 군중들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태극기 게양과 인쇄물 배포 등을 주도하였다. 이 시위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였고, 1920년 1월 임시의정원 의원(강원도 대표)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4월 20일 북경에서 열린 군사통일주비회에 하와이 독립단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상해로 가서 국민대표회의를 준비하다 1923년 1월부터 5월 말까지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북경지역 대표로 참석, 창조파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큰 결실이 없이 끝났다. 1926년 안창호와 원세훈 사이에 제독립단체들의 역량을 결집,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 본토에서 민족 협동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유일당운동이다. 첫 결실로 1926년 10월 16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결성되었고, 맹천 선생은 이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장건상 등 6명과 더불어 집행 위원이 되었다. 이어서 상해, 남경, 광동, 무한 등에서도 유일독립당촉성회가 속속 결성되었고, 1927년 11월 9일에는 이들 다섯 지역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맹천은 이 연합회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해인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만주 화전과 반석에서 개최된 전민족 유일당 조직회에 참석하여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 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독립운동가 박건병 선생 생가터
주시경의 제자로서 국어학자이자 철원 출신 독립운동가인 박건병(필명:맹천)은 철원군 동송읍 도피안사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의 군단조직인 철원애국단을 창설하는 데 참가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김상덕이 주동하여 조직한 애국단에서 학무과장을 맡았으며 이어서 강원도 도단부를 설치하는 데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애국단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제2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0월 10일 철원 사요리 우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될 때, 오세덕과 더불어 군중들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태극기 게양과 인쇄물 배포 등을 주도하였다. 이 시위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였고, 1920년 1월 임시의정원 의원(강원도 대표)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4월 20일 북경에서 열린 군사통일주비회에 하와이 독립단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상해로 가서 국민대표회의를 준비하다 1923년 1월부터 5월 말까지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북경지역 대표로 참석, 창조파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큰 결실이 없이 끝났다. 1926년 안창호와 원세훈 사이에 제독립단체들의 역량을 결집,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 본토에서 민족 협동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유일당운동이다. 첫 결실로 1926년 10월 16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결성되었고, 맹천 선생은 이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장건상 등 6명과 더불어 집행 위원이 되었다. 이어서 상해, 남경, 광동, 무한 등에서도 유일독립당촉성회가 속속 결성되었고, 1927년 11월 9일에는 이들 다섯 지역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맹천은 이 연합회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해인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만주 화전과 반석에서 개최된 전민족 유일당 조직회에 참석하여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 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주시경의 제자로서 국어학자이자 철원 출신 독립운동가인 박건병(필명:맹천)은 철원군 동송읍 도피안사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의 군단조직인 철원애국단을 창설하는 데 참가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김상덕이 주동하여 조직한 애국단에서 학무과장을 맡았으며 이어서 강원도 도단부를 설치하는 데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애국단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제2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0월 10일 철원 사요리 우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될 때, 오세덕과 더불어 군중들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태극기 게양과 인쇄물 배포 등을 주도하였다. 이 시위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였고, 1920년 1월 임시의정원 의원(강원도 대표)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4월 20일 북경에서 열린 군사통일주비회에 하와이 독립단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여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상해로 가서 국민대표회의를 준비하다 1923년 1월부터 5월 말까지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북경지역 대표로 참석, 창조파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큰 결실이 없이 끝났다. 1926년 안창호와 원세훈 사이에 제독립단체들의 역량을 결집,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 본토에서 민족 협동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유일당운동이다. 첫 결실로 1926년 10월 16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결성되었고, 맹천 선생은 이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장건상 등 6명과 더불어 집행 위원이 되었다. 이어서 상해, 남경, 광동, 무한 등에서도 유일독립당촉성회가 속속 결성되었고, 1927년 11월 9일에는 이들 다섯 지역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맹천은 이 연합회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해인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만주 화전과 반석에서 개최된 전민족 유일당 조직회에 참석하여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 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