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원 창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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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29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우리 고장 고성에선 예로부터 많은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의 한 분으로 최정원 선생이 대한제국의 국운이 다할 무렵 탄생하였으니 1892년 1월 22일이다. 선생은 아버님 경산 최한승 공의 훈도 아래 학문을 닦으셨다. 경산공은 한말의 이름난 애국문신 성재 허전 선생의 고제이시다. 문성공 최아로부터 비롯된 전주최씨 집안은 대대로 의로운 행적이 많았으니 의민공 최균 의숙공 최강 형제는 임진왜란 때 이 고을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공훈을 세우셨던 것이다. 선생이 열아홉살 되던 해 나라는 망했다. 그래도 선생의 나라 사랑하는 정열은 치열하게 불타올랐다. 기미년 3월 독립운동이 전개되자 선생과 그 형제는 앞장서서 이 고장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시었다. 중형 정철 선생이 서울에서 입수한 독립선언문을 선생께선 국천광장에서 낭독하시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셨으니 고성군에서 구만면이 독립만세를 외친 선구자가 되었다. 구만에서 만세를 부르며 배둔으로 내려가던 군중이 일본 헌병대들의 제지를 받았을 때 선생의 아우 정주 선생이 이를 물리치셨고 선생께선 계속 만세행렬을 이끌어 당당히 민족독립의 의지를 혀셨다. 그렇게 하여 일본 관헌에게 붙잡힌 바 되었는데 그 혹독한 고문과 교묘한 회유에 굴하지 않고 장부의 지조를 끝끝 관철하셨다. 진주감옥에서 3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시던 중 1921년 4월 7일 조국독립을 보지 못하고 한많은 일생을 마치셨으니 그때 선생의 나이는 겨우 서른이었다. 슬프도다 그때 남기신 선생의 옥중 시는 가슴을 에이듯 하다. 그러나 선생의 뜻 헛되지 않아 이윽고 광복의 날이 왔다. 선생을 비롯한 이 고을 사람들의 의거는 유림들에 의해 철성지에 기록되었으며 일본 헌병들과 충돌한 배둔마을에 의사들을 기념하는 삼일탑이 세워졌다. 선생의 삼형제는 화촌 뒷산에 유택에 편안히 잠들고 계시다. 이제 우리는 선생께서 사시던 마을 앞에 창의비를 세워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생의 거룩한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나라의 돈으로 세운 이 돌에 몇 자 새기거니와 사모와 현창의 정을 어떻게 다할 수 있으리오. 마땅히 온 겨레는 마음 깊이 선생의 뜻을 본받아 가꾸어 길이 보람의 꽃을 피울지니라.
1984년 2월 1일 유학 이병주
晉州 獄中 詩(진주 옥중 시)

板屋深深夜抵年(판옥심심야저년)
撲窓風雨冷不眠(박창풍우냉불면)
寧爲九死瀋陽鬼(영위구사심양귀)
不與卉裳共戴天(불여훼상공대천)

깊어가는 감옥의 밤은 한 해와 맞먹도록 지루하기만 하다
창을 때리는 차가운 비바람에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차라리 아홉 번 죽어 만주벌판 심양의 귀신이 될지언정
일본놈판 같은 하늘 아래 살지는 않으리라.
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마을회관 옆 순국지사 최정원 선생 창의비를 찾아왔다.
殉國志士 崔正元 先生 彰義碑(순국지사 최정원 선생 창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