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669
- 탐방로그
- 애국지사 허재기의 묘 근처에는 저동마을 버스정류장이 있다. 독립운동가 허재기 태어난곳 표지석과 애국지사 허재기의 묘는 약 320m 떨어져있으며, 도보로 5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에 진욱 진호이며 상복의 자에 철도 영도 훈도다. 정부에서는 공이 조국광복에 이바지한 공로를 기려 1977년에 대통령 포상을 하였다. 아아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어찌 우연에서 왔으랴! 선열들이 피와 살과 뼈와 그리고 일생을 조국 위하여 불살은 대가에서 온 것임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지금 공은 말없이 잠들어 계시다. 그러나 공의 거룩한 정신은 온 겨레의 혈맥 속에 붉게 영원히 맥박치리라.
초계 변지섭 찬 병서
1984년 월 일 좌해 허선생 묘역정화위원회 근수
초계 변지섭 찬 병서
1984년 월 일 좌해 허선생 묘역정화위원회 근수
허재기 선생과 이정수 선생 묘소를 탐방하기 위해서 찾았다.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669로 찾아가는 중에 또 묘소 안내판이 보였다. 산이 아니고 논 가운데 있지만 길이 매우 좁다.
독립지사 좌해 허재기 선생의 묘
좌해 허재기 선생은 1919년 3월 20일 회화면 배둔리 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셨으며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난 후 저연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단주동맹, 저축계몽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정기 회복과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 묘소 소재지: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669번지
2007. 4. . 고성군수
좌해 허재기 선생은 1919년 3월 20일 회화면 배둔리 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셨으며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난 후 저연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단주동맹, 저축계몽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정기 회복과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 묘소 소재지: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669번지
2007. 4. . 고성군수
애국지사 허재기 선생 묘지
(위치 :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669번지)
- 20m 전방 -
(위치 :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669번지)
- 20m 전방 -
全州崔氏 淑伊 之墓(전주최씨 숙이 지묘)
全州崔氏 淑伊 之墓(전주최씨 숙이 지묘)
독립지사 허재기 공의 자부이시며 순국열사 허상구 공의 처로서 후대에 길이 빛날 자식 위해 헌신하시고 금생에 도를 이루시고 불의 세계로 가신 이 분의 경민심을 후대에 길이 남기고자 하노라
서기 2007년 음 9월 12일 축묘자 시
독립지사 허재기 공의 자부이시며 순국열사 허상구 공의 처로서 후대에 길이 빛날 자식 위해 헌신하시고 금생에 도를 이루시고 불의 세계로 가신 이 분의 경민심을 후대에 길이 남기고자 하노라
서기 2007년 음 9월 12일 축묘자 시
志士 左海 金海許公 之墓(지사 좌해 김해허공 지묘)
공의 휘는 재기요 자는 범서며 호는 좌해니 김해허씨다. 고려 공민 조의 충신 보승 중랑장 익정절 호은 선생 휘 기는 공의 16세조며 퇴계 이황 선생 문하로서 학행으로 공릉 참봉에 천수된 증 형조참판 천산재 휘 천수는 11세조다. 조는 휘 경순이요 고는 휘 정근이며 비는 광산김씨 경순의 녀다. 공은 1887년 10월 28일에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에서 출생하시니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혀 재동의 이름을 얻었다. 삼십 전후 양친과 아우를 여이어 집안의 믿을 자 부인과 제수와 철없는 자녀 조카뿐이었다. 이러한 경황망석 속에서도 조국광복을 위한 일념은 뜨겁게 불타올라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공은 최정주 최정원 등과 밀의하고 고성군 동북부 6개면을 연락
하여 3월 20일 구만면 국천사장에서 거의하였다. 독립선언문은 최정원이 낭독하였으며 공은 공약 3장의 뜻을 부연하였다. 구만에서 출발한 시위행렬은 회화면 배둔에서 동지 김갑록 서찬실 등과 합류하여 민족의 정기를 십분발휘하였다. 일모에 구만으로 돌아온 공은 한인관리 퇴직 권고문을 작성하여 다음날 각 군면을 비롯한 각 관공서에 이를 발송하였다. 권고문에 이르기를 「그대는 어찌 도이의 노예가 될랴는가! 1일 조속 용퇴하여 민족 반송의 오명을 벗어라」고 하였다. 일찌기 의기상조한 변상태 곽인협 등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동분서주 자리의 따뜻할 겨를이 없었다. 1926년 10월 상해임시정부의 국무령 이상룡의 군자금 모집 지령서를 밀휴대하고 고향인 고성에 잠입하였던 윤영백의 심방을 받은 공은 최경진과 더불어 군자금 모집에 전력하다가 고성경찰서에 피검되었다. 경상남도 제3부(경찰국)에 격류되어 갖은 악형을 겪었으나 결코 굽힘이 없었다.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공은 향리에 저연학당을 창설하여 청소년을 모아 국가민족을 위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우렸으나 일경의 간섭으로 1년 유여에 이것마져 폐쇄의 비운을 겪어야 했다. 공은 강직담대하여 신의에 두터웠으며 침중과묵하여 우국의 지성에서 때로 한마디 하는 말이 능히 사람의 폐부를 찔러 듣는 이로 하여 숙연케 하였다. 1968년 5월 25일에 졸하다. 전 배는 함안이씨 진옥의 녀니 녀에 진양인 정영천 선령인 남태길이며 후배에 성산이씨 맹석의 녀니 자에 상구 상복이요 녀에 함안인 이범수다. 상구의 자에 성도요 그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