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관 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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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산27-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산27-3 독립유공자 이재관 선생 구 묘비를 찾았다. 묘소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獨立有功者 李在官 之墓(독립유공자 이재관 지묘)
독립유공자 묘비 이건기
거류면은 월리 산 27의 3번지에 세워진 이 비석은 서기 1987년에 국비보조를 받아 벽방산 한등성이에 자리하였던 고 독립유공자 이재관 공의 묘소에 건립되었던 묘비석이다. 서기 2001년 10월 애국지사 합동안장 관련시책에 준하여 공의 유골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게 되면서 묘비석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일제 민족차별의 실상을 폭로하고 오직 대한독립을 위해 그 젊음을 받치셨던 공의 숭고한 애국심과 거룩한 공헌을 높이 기리지 않을 수 없기에 고성군은 공의 출생지인 이 땅에 묘비나마 길이 보존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애국애족의 정신을 고취시키는데 그 계기를 마련함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공을 추모합시다.
2003년 5월 이건 고성향토사연구위원 허태동 기
獨立有功者 李在官 之墓(독립유공자 이재관 지묘)
공의 자는 경헌이고 호는 소몽인데 함안이씨로서 휘는 재관이니 시조 휘 상의 23세손이며 사헌부 대사헌 증예조판서이던 매헌공 휘 인형의 14세손이다. 조부는 진한이오. 부인 보환의 5남 4녀 중 장자이며 모는 전주 최성남이고 처인 전주최씨 휘 농호의 여 도남은 서기 1928년 무진 4월 19일 생이다. 모는 효열부로서 고성군 유림상을 받았고 대한충의효열록 상권에 실렸다.
공은 서기 1920년 음력 11월 5일에 본군 거류면 은월리 197번지에서 났고 거류를 거쳐 고성공립보통학교를 마친 후 고성농업전수학교를 나올 때 학교장 추천생으로 일본 동경 공예학교에 입학했었다. 40년 4월에 장기현 동조시 선월정 거주 임우칠 집에서 그 곳 농교신입생과 이상만 외 12명이 모여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고 재일학생단이라 이름하였다. 41년 3월에 졸업하자 일부 동지는 진학하여 현지에 남고 각각 귀국하여 경북 예천 경남 고성 함남 흥남 서울 평북 충북 황해 등지에 취직 혹은 진학하되 본부를 동경에 두어 공의 하
숙처를 거점 삼아 수차 밀회를 거듭하여 단원이 80여명에 이르렀고 전국강으로 33식 점조직 행동을 모책하던 중 42년 2월에 경북 예천에서 동지 밀회타가 왜경에 탄로돼 80여명의 국내외 전 동지가 체포되고 예천 영주 상주 봉화 안동 문경 점촌 경찰서에 구금 유치됐었다.매질 및 꺼꾸로 매달고 한겨울에 코에다 물붓기 등 잔인한 고문 끝에 그 해 10월에야 20여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나머지는 대구형무소로 이감 후 오랜 예심 기간을 거쳐 43년 7월 7일에사 대구지방법원 판결로서 각각 수형했는데 공은 42년 2월 23일 동경 세타가야 송택정 하숙집에서 체포당하여 대구지방검사국을 거쳐 상주경찰서에 유치됐었다.해방과 건국 이후 동지 대표 이상만은 건국포장을 공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문교부 주최 성인교육 문맹자 퇴치 양성소에서 두 달 동안의 교육을 받은 다음 경남 성인교육 지도주사로서 고성군 주재 근무때 1읍 13면의 자연부락 마다에 공민학교를 세워 한글을 배우게 하는 등유와 학용품마저 희사하여 가며 5년 세월을 봉사하였다.6.25가 터지자 방위장교로 몸바쳐 괴뢰군의 진주 방면 침입때는 150명을 진두 지휘하여 고성 영오 원문곡 동해당 거리 등지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집결지 부산에서는 마산 교육대 제3대대장으로 임명받았다가 총공격령이 내리자 산청 방면까지 진격하여 3년간의 방위군 생활을 끝내었다.귀농하여 비산 비야를 일구고 현재 4천평의 옥토 중 천평의 인삼포도 재배하는 다각 농가로서 각 기관의 자문 및 학교의 육성회장 정화위원장을 지내고 또는 광복회원 학구단위 노인회장 은정자 유적회장 등을 책임진 애향적 사회 공로로 내무부와 경남도의 장관 감사장도 받은 적이 있었다.86년 7월 28일에 67세로 떠나매 벽방산 고등선좌에 고이 잠들다. 슬하에 1남 2녀로 현석(성만) 다음 영숙은 서 김수웅을 명숙은 서 박도만을 저마다 배우하다.
숙처를 거점 삼아 수차 밀회를 거듭하여 단원이 80여명에 이르렀고 전국강으로 33식 점조직 행동을 모책하던 중 42년 2월에 경북 예천에서 동지 밀회타가 왜경에 탄로돼 80여명의 국내외 전 동지가 체포되고 예천 영주 상주 봉화 안동 문경 점촌 경찰서에 구금 유치됐었다.매질 및 꺼꾸로 매달고 한겨울에 코에다 물붓기 등 잔인한 고문 끝에 그 해 10월에야 20여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나머지는 대구형무소로 이감 후 오랜 예심 기간을 거쳐 43년 7월 7일에사 대구지방법원 판결로서 각각 수형했는데 공은 42년 2월 23일 동경 세타가야 송택정 하숙집에서 체포당하여 대구지방검사국을 거쳐 상주경찰서에 유치됐었다.해방과 건국 이후 동지 대표 이상만은 건국포장을 공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문교부 주최 성인교육 문맹자 퇴치 양성소에서 두 달 동안의 교육을 받은 다음 경남 성인교육 지도주사로서 고성군 주재 근무때 1읍 13면의 자연부락 마다에 공민학교를 세워 한글을 배우게 하는 등유와 학용품마저 희사하여 가며 5년 세월을 봉사하였다.6.25가 터지자 방위장교로 몸바쳐 괴뢰군의 진주 방면 침입때는 150명을 진두 지휘하여 고성 영오 원문곡 동해당 거리 등지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집결지 부산에서는 마산 교육대 제3대대장으로 임명받았다가 총공격령이 내리자 산청 방면까지 진격하여 3년간의 방위군 생활을 끝내었다.귀농하여 비산 비야를 일구고 현재 4천평의 옥토 중 천평의 인삼포도 재배하는 다각 농가로서 각 기관의 자문 및 학교의 육성회장 정화위원장을 지내고 또는 광복회원 학구단위 노인회장 은정자 유적회장 등을 책임진 애향적 사회 공로로 내무부와 경남도의 장관 감사장도 받은 적이 있었다.86년 7월 28일에 67세로 떠나매 벽방산 고등선좌에 고이 잠들다. 슬하에 1남 2녀로 현석(성만) 다음 영숙은 서 김수웅을 명숙은 서 박도만을 저마다 배우하다.
무릇 참된 금생의 보람은 자손에 꽃피우리. 문무를 갖춘 애향애국의 지사여 길어 명복을 받으라.
글지은이 파성 설창수 글씨쓴이 초암 변지섭
서기 1987년 정묘 추 10월 일 고성군수 삼가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