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의거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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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86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기 1973년 10월 일 건립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867 양지마을숲을 찾았다.
제7경 월성숲
월성계곡 장군바위 모퉁이를 돌아 월성 들머리에 성천이 빛어낸 아름다운 명소이다. 1997년 산림청에서 산촌개발사업으로 본디 자리한 노송주변 하천을 정비하고 팔각정을 세웠으며 주변에 많은 나무를 심고 조경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는 구한말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거하여 남강 오일선, 김성진, 김현수, 하거명, 박화기 등 40여명이 월성서당에 모여 일으킨 월성의병들의 장거를 기려 세운 의거비가 있다. 월성이란 달이 동쪽 장군바위 위에서 떠올라 마을앞 성삼봉을 비친다 하여 월성으로 쓰기도 하였으나 월성마을의 월봉산의 옛 이름인 월성산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月星義擧事蹟碑(월성의거사적비)
옛 월성의거사적비 안내판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월성리에서 남강 오일선 선생을 중심으로 의사 40여 명이 월성서당에 모여 도총,유격,후군,군수, 정보등의 부서를 편성, '월성의병'이라 했다. 군사본부를 김현일의 사랑채에 두고 작전 지휘를 했다. 1906년, 문태서 의진과 제휴, 고창골에서 싸웠고 덕유산 의병 2백여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기로 했다. 1907, 거창읍 주둔 적을 습격, 임구희가 전사했다. 1908년, 무주구천동 전투에서 전과를 거두었으나 하거명, 김권원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1909년, 전북 계북전투에서는 유춘일이 전사하고 박화기 아장과 동생 박수기는 일제의 정탐군 '최고미'의 밀고로 무주수비대에 피체되어 순국했다. 그의 밀고는 계속 되어 하일청이 적에 피살되었다. 1912년 4월 26일 박민기의사는 월성리에 나타난 '최고미'를 처단하고, 피체되어 1912년 9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서울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일합방 후 의병이 더러 적에 잡혀, 김응삼은 10년을 서울감옥에서, 김군백은 진주감옥에서 5년을, 임찬일, 김일종은 전주감옥에서 5년의 형을 치렀다. 그 의로운 정기는 영원히 빛날 것이요. 후생들의 마음속에 조국수회와 번영의 길을 밝혀 주는 횃불이 될 것이다.

월성의거사적비
아. 월성-의병. 거창의 월성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경상남도 안의군 북상면 양지리(1165번지)에서 태어나 학문과 경전에 능통하여, 큰 스님으로 호를 받았으며, 기골이 장대한 대호 문언조를 중심으로, 의사 김성진, 김현수, 하거명, 박화기등, 이 지역민 50여명은 월성서당(1165번지)에 모여 국가정세를 토론하고 의병활동을 전개해야한다는 필연성을 인지하여 의병을 발족 의병봉기를 결의하게 되었다. 도총, 유격, 후군, 군수, 정보, 감찰, 경리 등의 부서를 편성하여 부대의 이름을 월성의병이라 일컬었다. 문언조 선생은 군사본부를 김현일(현영)의 사랑채(1294번지)에 설치하여 작전 지휘를 하였다. 황점. 경원탁, 내게 이규현, 양지. 오필선, 심동 안진태(교태), 산수. 고제두, 병곡 신병삼, 창선. 장명국, 갈계. 임필희 등을 각 연고지에 파견하여 병력, 군수, 감찰 정보에 관란 강력한 전투체제를 갖추었고 이들은 군자금을 스스로 헌납하며, 동민도의병을 돕고자 음식, 자금, 인명 등을 적게는 십여명씩 많게는 사오십명씨 마을 단위로 출헌하였다. 유걱장군 하거명, 아장군 박화기는 정예병사 유춘일(일명 유육손), 김권원, 박수가, 임구희, 하일청, 김응삼(해운), 박찬일, 김일종, 강옥현, 박문규,박정규, 조순집, 이순갑 등을 인솔하여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열락을 취하며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그 암호는 베 짜는 북을 가는 소리로 하였다. 또 깅옆에 표식을 비차하거나 철거하는 방법으로 행동을 신속 민활하에 하여 적의 허점을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후군장군 김성진은 박민가, 조두식, 신성규, 조성의, 김순배, 임학규, 이규일, 전조석,송군필 등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전방과 호응하여 임기응변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수장 김현수는 김환제, 이준호, 조성필, 서환식,김군배, 조성목(덕일), 강옥성 등에게 군량과 무기 탄약 등을 수집, 제조, 조달하게 하였으며, 장명국, 임필희는 자금을 조성관리하고, 강임형(임석)은 의병인을 모집, 감찰 이석길(권호)은 보부 소재 마을 앞에 주막을 차려 왕래하는 사람들을 살피며 정수경, 이순진으로 하여금 정보를 수집, 조달케하였다. 월성의병은 1906년 문태서가 인솔한 삼남(호서)의병과 제휴하여 싸우리도 하고, 각처에 모여든 덕유산 의병 2백여명에게 군수 물자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나기수(기균), 오지선, 이인호의 책임하에 후군이 담당하였으니, 월성은 실로 남방의병의 기지가 되었다. 1906년 9월에는 삼남의병과 합세하여 장수 싸움에서 적 10여명을 몰살하고 무주 고창골에서도 수십명의 적을 죽이는 개가를 올렸다. 1907년에는 거창읍 씨악실에 주둔한 적을 습격도중 임구희가 전사하여 북상면 강선대 모리절로 피신중 일경이 모리절까지 따라와 작전을 전개할 무렵 선제공격으로 30여명 전원 사살하였다. 1908년 유명한 무주구천동 삿갖골 두 전투에서 삼남의병및 덕유산의병과 연합작전을 펴 적 이백여명을 포휘 섬멸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불행하게도 하거명, 김권원이 장렬히 전사하는 등 의병들의 피해도 많았으며 동년 구월 삿갓전투에서 적 7명을 죽였으나 적의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박화기, 박수기, 유춘일이 전부 무주수비대에 피체되어 폭도 혐의로 1908년 10월 4일 장수계북양악에서 모진 고문과 자인하게 사살되었다. 최고미의 밀고는 계속되어 1909년 12월 7일 하일청도 적에 체포되어 살해되었으니 후군은 밀정을 색출하여 1910년 3월 남산들판에서 처단하였다. 그 직후 적은 월성에 대거 출동하여 전 동민을 모아놓고 아이, 안여자, 어른을 가리지 않고 가혹한 고문(인두)으로 심문하였다. 이때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의사 박만기는 저에게 자신이 한 단독 소행이다 라고 허위자백을 하였다. 잔여 의병과 동민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마을의 안정을 찾았으나 그는 피체되어 1912년 9월 28일(대구복심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 받고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7년의 옥고를 치렀다. 통한의 한일합방이 강제로 이루어진 후 문언조선생과 의사들은 전술을 바꾸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의병이 적에 잡혀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김응삼(심해운)은 종신형을 선고받아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형을 김군백은 진주감옥에서 5년을, 박찬일, 김일종은 전주감옥에서 5년의 형을 치렀다. 강옥성, 박문규, 박정규,조성목은 극심한 고문으로 빈사상태에서 석방되었으며 후군장군 김성진은 무주수비대에 체포되어 압송도중 탈출하였고 조순집, 이순갑은 일생을 각지로 뜨돌았으며 경원탁도 피신도중 위천상천 진등마을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실신되어 풀려났다.
[서기 1970년 월성의거사적부는 건립당시 인명과 순위를 왜곡 건립하였기에] [서기 2018년 4월 22일 경상남도 진주서부 .....이 수정, 보완하여 유족의 선금으로 2020년 1월 30일 재건립, 마음을 담아 후손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시는 교육의 장으로 탈바꿈하여 저 일월과 함꼐 완연한 횃불로 항구희 되살아 타오를 것이다.
월성의병사적비는 연로하 생존자의 목격담, 문달천, 이옥원님 말씀에 나랏님이 서당을 야밤에 의관복차림으로 두번 방문 앞, 뒤에 날옆한 장정이 동행하였다. 김상용의 말씀에 박화기, 박수기, 유춘일은 시신훼손이 심한관계로 장정 5명이 바지계에 나누어 담아지고 마을에 도착하여 덕석을 펴고, 키가 큰 사람, 적은 사람, 마른 사람으로 구분하였다. 향리의 전언 및 전적지 답사, 유족등의 비망 또는 족보등의 근러고 하였으나 그 후 판결문을 찾아 수집, 보완하였다. 지금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1867번지)에는 월성의병사적비가 서있다.(산하의 주민중의 애국인사들도 협력하였다는데 이름을 전하지 못함)
月星義擧事蹟碑(월성의거사적비)
바뀐 비문을 이해 가능토록 좌,우에 각각 前, 現 비문을 같이 표시하였다.
前 월성의거 사적비문
의리를 태산같이 무겁게 생각하고 묵숨을 홍모처럼 가벼이 여기는 이는 곧 위인이라 할것이요 한 민족과 국가의 영고성쇠는 오르지 그 민족과 국가를 구성한 민중속에 의인이 있고 없는데 달렸다 할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생한 실례를 국세가 날로 기우러저가는 구한말및 왜정당시에 많이 찾아볼수있었고 그 뚜렸한 한가지로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의 봉기를 들지 않을수 없다. 이 의병은 전국각지에서 궐기아니한 곳이 없었으나 교남에서도 벽읍이라 할수 잇는 거창역내에서 가장 치열하였든것이다. 1905년 을사에 침략자 일제가 우리나라에 보호조약을 강행하자 남강 오일선선생은 의사 김성진 김현기 하거명 박화기등 40여명을 월성리 서당에 규합하여 도총 유격 후군 군수 등의 부서를 편성하여 월성의병이라 일컬었다. 군사본부를 김현일의 사랑채

現 월성의거 사적비문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정과 의릴 태산가이 무겁게 생각하고 목숨을 홍모처럼 가병이 여기는 이가 곧 義人이라 할것이요 한민족과 국가의 영고성쇄는 오르조 그 겨레와 나를 구성한 민족속에 의인이 있고 없는데 달렸다 할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생한 실례를 국세가 날로 기우러져 간 구한말과 그 침통한 왜정 당시에 많이 찾아 볼 수 있고 그 가운데서도 뚜렷한 한가지로는 일제에 항쟁한 의병의 봉기를 들지 않을수 없다. 이 의병은 전국각지에서 궐기하지아니한 곳이 없었으나 삼남(교남)에서도 벽읍이라 할 거창역내에서 가장 치열하게 일어난것이다. 1905년 을사에 침략자 일제가 우리나라에 이른바 보호조약이란 것을 강해아지 대호 문언조(문현조)는 의사 김성진 김현수 하거명 박화기 등이 지역민 50여명을 월성서당 1165번지에 모여 국가정세를 토론하고 의병활동을 전개하야한다는 필연성을 인지하고 의병을 규합하니 이들 의인과 함께 도총 유격 후군 군수 감찰 정보 경리등의 부서를 편성하고 의병군을 조직하여 그 군사를 월성의병이라 일컬었다. 문어조선생은 의병본부를 김현일(현영)의 사랑채 1294번지에 차려 참모를 두고 황점에 경원택 내계에 이규현 양지에 오필선, 심동에 안진태(교태) 산수에 고에두 병곡에 신병차삼 창선에 장명국 갈계 임필희 등을 배치하여 병력을 배치하여 병력과 군수정보 등에 전투제제를 갖추었다. 유격장군 하거명은 아장군 박화기와 함께 정예병사 유
에 차려 참모를 두고 황점에 경원택 내구에 이규현 양지에 문언조 심동에 안진태 산수에 고제두 병곡에 진병삼등을 배치하여 병력 군수 정보에 관한 강력한 전투체제를 갖추였다. 유격장 하거명은 아장 박화기화 함께 정예병사 유춘일 김권원 임구희 박수기 하일청 김영삼 임찬일 일일종 강옥성 박문규 박정규 조순집 이순갑등 인솔하여 산속에 막사를짓고 수시로 출몰하여 적을 습격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후군장 김성진은 박민기 조두식 신성규 조성의 김순배 임학규 이규일 전조석 장춘기 송군필등에게 무술을 교련하고 전방과 호응하여 임기응변의 활동을 하였다. 또 군수감 김현수는 김환제 이준호 조성필 서환식 김군백 조성목등으로 군량과 무기 탄약을 포집 제조 조달케 하였다. 그리고 감찰 이석길은 마을앞에 주막을 차려 왕래인을 살피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대개 나기숙 오지선 이인호의 책임으로 후군이 담당하였으니 월성은 실로 남방의병의 기지가 되였다. 이해 9월에는 호서의병과 합세하여 장수 싸움에서 왜적10명을 사살하고 무주 고창골에서도 수십명을 죽여 개가를 올렸다. 1907년 거창읍에 주둔한 적을 습격하여 임구희는 전사하였고 1908년 유명한 구천동전투에서는 호서및 덕유산의병과 연합전선을 펴여 적200여명을 포위 섬멸하였으나 하거명 김권원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병사들의 부상도 적지 않았다. 동년 9월 삿갓골싸움에서 적 7명을 또 죽였으나 10월 박화기 박주기 유춘일이 장수 계북 양악에서 전사하였다. 1909년 10월 적의 밀정 최곰의 밀고로 하일청도 피살되였으니 후군은 밀정을 색출하여 1910년 3월 남산들판에서 처단하였다. 이해 통분의 한일합병이 이루어진후로 선생과 의사들은 전술을 바꾸어 항쟁을 계속하였

춘일 김권원 박수기 임구희 하일청 김응삼)해운) 박찬일 김일종 강옥성 박문규 박정규 조순집 이순갑 등을 인솔하여 산속에 막사를짓고 수시로 출몰하여 적을 습격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후군장 김성진은 박민기 조두식 신성규 조성의 김순배 임학규 이규일 전조석 송군필등에게 무술을 교련하고 전방과 호응하여 임기응변의 활동을 하였다. 또 군수감 김현수는 김환제 이준호 조성필 서환식 김군백 조성목(덕일),강옥성등으로 군량과 무기 탄약을 수집 제조 조달케 하였으며 감찰 이석길(권호)은 마을앞에 주점을 차려 왕래인을 살피며 정수경 이순진으로 하여금 정보를 수집 조달케 하였으며 강임의임석)은 의병인을 모집하였다. 1906년 이후 월성의병은 혹은 문태서 장군이 인솔한 삼남(호서)의병과 제휴하기도 하고 각처에서 모여든 덕유산의병 2백여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대개 나기숙(기균) 오지선 이인호의 책임으로 후군이 담당하였으니 월성은 실로 남방의병의 기지가 되였다. 이해 9월에는 삼남의병과 합세하여 장수 싸움에서 왜적십여명을 사살하고 무주 고창골에서도 수십명을 죽여 개가를 올렸다. 1907년 거창읍 씨악실에 주둔한 적을 습격도중 임구희가 전사하고 강선대 모리절 전투에서 일경 30명 전원 사살하였다. 1908년 유명한 구천동 삿갓골 두 전투에서 덕유산의병과 삼남의병은 연합전선을 펴 적 200여명을 포위 섬명하였으나 하거명 김권원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병사들의 부상도 적지 않았다. 동년 9월 삿갓골싸움에서도 적 7명을 죽였으나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1908년 10월 4일 박화기 박수기 유춘일이 무주수비대에 피체되어 폭도혐의로 장수 계북 양악에서 모진고문과 잔인하게 사살되었다. 1909년 12월 7일 최고미 밀고로 하일청도 피살되였으니 후군은 밀정을 색출하여 1910년 3월 남산들판에서 처단하였다. 그 직후 적은 월성에 대거 출동하여 전동민을 가혹하고 잔인한 고문(인두)으로 심문하였다. 이때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박민기는 적에게 자신이 단독 소행이다라고 허위 자백을 하였다. 잔여 의병과 동민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마을에 안정은 찾았으나 그는 피체되었다. 1910년 통분의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뒤로 월성의병은 전술을 바꾸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대개는 적에게 잡혀 갖은 고초를 겪을수밖에 없었다. 박민기는 1912년 9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 받고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8년의 옥고를 치뤘다. 김응삼(해운)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형을 김군백은 진주감옥에서 4년을 박찬일 김일종은 전주감옥에서 5년을 옥살이 하며 신음하였고 강옥
에 차려 참모를 두고 황점에 경원택 내구에 이규현 양지에 문언조 심동에 안진태 산수에 고제두 병곡에 진병삼등을 배치하여 병력 군수 정보에 관한 강력한 전투체제를 갖추였다. 유격장 하거명은 아장 박화기화 함께 정예병사 유춘일 김권원 임구희 박수기 하일청 김영삼 임찬일 일일종 강옥성 박문규 박정규 조순집 이순갑등 인솔하여 산속에 막사를짓고 수시로 출몰하여 적을 습격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후군장 김성진은 박민기 조두식 신성규 조성의 김순배 임학규 이규일 전조석 장춘기 송군필등에게 무술을 교련하고 전방과 호응하여 임기응변의 활동을 하였다. 또 군수감 김현수는 김환제 이준호 조성필 서환식 김군백 조성목등으로 군량과 무기 탄약을 포집 제조 조달케 하였다. 그리고 감찰 이석길은 마을앞에 주막을 차려 왕래인을 살피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대개 나기숙 오지선 이인호의 책임으로 후군이 담당하였으니 월성은 실로 남방의병의 기지가 되였다. 이해 9월에는 호서의병과 합세하여 장수 싸움에서 왜적10명을 사살하고 무주 고창골에서도 수십명을 죽여 개가를 올렸다. 1907년 거창읍에 주둔한 적을 습격하여 임구희는 전사하였고 1908년 유명한 구천동전투에서는 호서및 덕유산의병과 연합전선을 펴여 적200여명을 포위 섬멸하였으나 하거명 김권원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병사들의 부상도 적지 않았다. 동년 9월 삿갓골싸움에서 적 7명을 또 죽였으나 10월 박화기 박주기 유춘일이 장수 계북 양악에서 전사하였다. 1909년 10월 적의 밀정 최곰의 밀고로 하일청도 피살되였으니 후군은 밀정을 색출하여 1910년 3월 남산들판에서 처단하였다. 이해 통분의 한일합병이 이루어진후로 선생과 의사들은 전술을 바꾸어 항쟁을 계속하였

춘일 김권원 박수기 임구희 하일청 김응삼)해운) 박찬일 김일종 강옥성 박문규 박정규 조순집 이순갑 등을 인솔하여 산속에 막사를짓고 수시로 출몰하여 적을 습격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후군장 김성진은 박민기 조두식 신성규 조성의 김순배 임학규 이규일 전조석 송군필등에게 무술을 교련하고 전방과 호응하여 임기응변의 활동을 하였다. 또 군수감 김현수는 김환제 이준호 조성필 서환식 김군백 조성목(덕일),강옥성등으로 군량과 무기 탄약을 수집 제조 조달케 하였으며 감찰 이석길(권호)은 마을앞에 주점을 차려 왕래인을 살피며 정수경 이순진으로 하여금 정보를 수집 조달케 하였으며 강임의임석)은 의병인을 모집하였다. 1906년 이후 월성의병은 혹은 문태서 장군이 인솔한 삼남(호서)의병과 제휴하기도 하고 각처에서 모여든 덕유산의병 2백여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대개 나기숙(기균) 오지선 이인호의 책임으로 후군이 담당하였으니 월성은 실로 남방의병의 기지가 되였다. 이해 9월에는 삼남의병과 합세하여 장수 싸움에서 왜적십여명을 사살하고 무주 고창골에서도 수십명을 죽여 개가를 올렸다. 1907년 거창읍 씨악실에 주둔한 적을 습격도중 임구희가 전사하고 강선대 모리절 전투에서 일경 30명 전원 사살하였다. 1908년 유명한 구천동 삿갓골 두 전투에서 덕유산의병과 삼남의병은 연합전선을 펴 적 200여명을 포위 섬명하였으나 하거명 김권원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병사들의 부상도 적지 않았다. 동년 9월 삿갓골싸움에서도 적 7명을 죽였으나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1908년 10월 4일 박화기 박수기 유춘일이 무주수비대에 피체되어 폭도혐의로 장수 계북 양악에서 모진고문과 잔인하게 사살되었다. 1909년 12월 7일 최고미 밀고로 하일청도 피살되였으니 후군은 밀정을 색출하여 1910년 3월 남산들판에서 처단하였다. 그 직후 적은 월성에 대거 출동하여 전동민을 가혹하고 잔인한 고문(인두)으로 심문하였다. 이때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박민기는 적에게 자신이 단독 소행이다라고 허위 자백을 하였다. 잔여 의병과 동민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마을에 안정은 찾았으나 그는 피체되었다. 1910년 통분의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뒤로 월성의병은 전술을 바꾸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대개는 적에게 잡혀 갖은 고초를 겪을수밖에 없었다. 박민기는 1912년 9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 받고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8년의 옥고를 치뤘다. 김응삼(해운)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형을 김군백은 진주감옥에서 4년을 박찬일 김일종은 전주감옥에서 5년을 옥살이 하며 신음하였고 강옥
으나 대개는 잡혀 박민기는 7년 김영삼은 10년을 서울감옥에서 김군백은 5년을 진주감옥에서 임찬일 김일종은 5년을 전주감옥에서 각각 영어의 몸으로 신음하였고 장옥성 박문규 박정규 조성목은 심한 고문으로 빈사상태에서 석방되었다. 김성진은 잡혀가든 도중에 탈출하였고 조순집 이순갑은 일생을 각지로 표류하였다. 8.15광복은 국제적 대세의 영향도 없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우리 선열 의인들의 애국애족에 불타는 거룩한 희생의 결정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포악무도한 왜적에 한사항전한 우리 월서의병의 용감하고 의로운 정기는 저 일월과 함께 영원히 빛날것이요 후생들의 마음속에 조국수호와 번영의 길을 밝혀주는 환연한 횃불이 될것이다.
광복후 26년 경술 8월 일

성 박문규 박정규 조성목(덕일)은 극심한 고문으로 빈사상태에서 석방되었다. 후군장군 김성진은 무주수비대에 체포되어 압송도중 탈출하였고 조순집 이순갑은 일생을 각지를 방랑하였고 경원탁은 도피중 워천 상천 진등에서 피체되어 가혹한 고문후 실신으로 플려났다. 1945년 8월 15일 민족의 국제정세의 흐름도 없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우리의 선열과 의사들의 애국애족에 불타는 거룩한 희생없이 다시 찾아올 빛줄기는 아니었다. 제국주의 탈을 뒤집어 쓰고 반만년 유구한 한민족의 역사와 겨레의 맥을 말살하려는 포악무도한 왜적에 맞서 결사항전한 우리 월성의병의 용감하고 의로운 거사와 그 거룩한 정기는 저 일원과 함께 영원히 빛날것이요 후손들의 가슴속에 조국수호와 민족번영의 길을 밝혀주는 찬연한 횃불로 항구히 되살아 타오를 것이다.
광복후 26년 경술 8월 일
문학박사 이희승 찬
문학박사 신현웅 개

월성의거사적비가 1970년 건립당시 순위와 인명이 왜곡되어 2018년 5월 16일 해체 2020년 1월 30일 유족회의 후원금으로 재건립되었다.
안내판 뒷면에는 영어로 설명이 되어있었다.
十五老農林禊員遺蹟(15노농림계원유적비)
十五老農林禊員遺蹟(15노농림계원유적비)
月星十五老農林禊員遺蹟序(월성15노농림계원유적비서)'
德裕山南(덕유산남)에 馳数十里(치수십리)하니 奇峯(기봉)이 崔屹(최흘)하고 別澗(별간)이 榮廻(영회)하야 重重濚濚而下有天府(중중영영아하유천부) 一局(일국)하니 天地明郞(천지명랑)하고 日月(일월)이 遍照(편조)로다. 前江大野(전강대야)요 後坪萬頃(후평만경)이라. 中間(중간)에 有村(유촌)하니 名曰月星(명왈 월성)이라. 設入数百年(설입수백년)에 居人姓姓(거인성성)이 某某安所澗屋(모모안소간옥)하야 子子孫孫(자자손손)이 藩延盛多(버연성다)하고 累代連綿而継継承承(누대연면이계계승승)하야 不知其数(부지기수)하니 邦無朱陳之誼乎(방무주진지의호)아 所謂桃源隱溣而相依相資(소위도원은론이상의상재)하야 前野後田(전야후전)에 交耕(교경)이 有時(유시)하고 相休相談(상휴상담)하며 如兄弟之誼(여형제지의)하고 如親戚之和)(여친척지화)하니 無異一春(무리일춘)이라.
惟我十五人(유아15인)은 生於斯長於斯(생어사장어사)하고 遊於斯老於斯(유어사노어사)하야 種田得栗(종전득율)하고 採山得薪(채산득신)하며 掘井而飮(굴정이음)하고 架屋而息(가옥이식)하니 不知勢月(부지세월)에 連薔接屋(연장접옥)하야 携手相休(휴수상휴)하니 交情一心(교정일심)에 一生之樂(일생지락)이 渾無此外而歲不我延(혼무차외이세불아연)이로다. 於焉致路(어언치노)하니 前情(전정)이 可憐(가련)이하. 於是(이시)에 首老長友曰(수노장우왈) 吾之十五老先世重恩(오지십오노선세중은)과 今世大緣(금세대연)을 不可虛度(불가허도)라 當結禊而上継吾祖先之事蹟(당결계이상계오조선지사적)하고 下傳吾子孫之遺謨(하전오자손지유모)이 不亦宣乎(불역선호)하 하니 咸曰可(함왈가)하다 하고 禊名曰(계명왈)農林禊(농림계)라 하야 資本立而年年一會(자본립이년년일회)에 相着論談(상착논담)하며 設風流而樂(설풍유이락)이러니 公道無情(공도무정)하야 棄世禊員(기세계원)이 十餘人(십여인)이라. 在世幾人(재세기인)이 年當會日(년당회일)에 回想昔日之樂(회상석일지락)하니 悲懷難禁(비회난금)이라. 自此以後(자차이후)로 遺於子孫(유어자손)하야 垂後世億萬斯年之不○也云甭(수후세억만사년지불○야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