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공삼형제 항일사적비

4

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725
탐방로그
경남 안의면 출신으로 세 형제가 모두 의병으로 활동했던 박화기, 박수기, 박민기 삼형제의 항일애국정신을 기리고자 2004년 11월 6일 건립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追慕(추모)
德裕山(덕유산) 정기받아 우뚝솟은 바리봉
바람골 삼정계곡 선경어린 삼천리
드높은 의기의 혼들 푸르게 살아있네

해 저문 황야에서 길 잃은 백의의 양
온 몸을 불태워 임 위한 하나의 마음
푸른 혼 끝없는 사랑 옷깃 더욱 여미네

사적비 세긴 글발 거룩한 임들 모습
의로운 길을 휘해 고귀한 삶의 희생
삼의사 그 높푸른 혼 횃불되어 빛내리

재종손 동인
7개월후 다시 찾은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725 황점마을 의사 박공삼형제 항일사적비를 찾아왔다.
의사 박공삼형제 항일 사적비
이 사적비는 경남 안의면 출신으로 의진활동을 한 박화기, 박수기, 박민기 삼형제의 항일애국정신을 기리고자 2004년 11월 6일 건립되었다.
박공삼형제는 오일선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1905년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안의군 북상면(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거의한 오일선 의진에 삼형제가 함께 참여하여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 의진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각지에서 모인 덕유산 의병 200여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등을 지르면서 항일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박화기, 박수가는 무주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순국하였고, 박민기는 1912년 4월 26일 안의군 북상면 양지리에서 최고미를 처단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박민기는 피체되어 1912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義士朴公三兄弟抗日事蹟碑
의사박공삼형제항일사적비
義士朴公三兄弟抗日事蹟碑
의사박공삼형제항일사적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보호조약"이 1905년 강행되자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니 이곳 거창군의 북상면 월성리(당시 안의군) 남덕유산 일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월성서당에서 40여명으로 결성된 월성의병에 관한 무용담을 빼놓을수 없다. 특히 월성의병의 활동에는 삼형제가 함께 참여하여 장렬한 순국을 했거나 마을을 구하고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 기꺼지 자신의 삶을 희생한 고귀한 정신이 깃들어 있어 더욱 웃깃을 여미게 한다. 바로 박공삼형제에 관한 이야기 이다. 맏이 박화기(1871~1907, 자는 순경, 호는 유석) 아장은 천성이 강직총명하였고, 둘째 박수기(1873~1909, 자는 순일, 호는 포은)의병은 성품이 곧고 지덕을 겸비하였으며, 셋째 박민가(1875~1940, 이명 민기 또는 선기, 자는 순칠, 호는 송강) 의병 역시 대의를 중히 여기며 서예에도 능필이었는데, 이들은 밀성인이다. 삼공은 모두 5남 2녀로 은산부원군 문헌공의 후예요, 삼오정공의 12세손이다. 증조부는 박지형이요 조부는 박윤환이며 부는 박이익이다. 의병 삼형제는 동지들과 함께 각지에 연락처를 정보를 수집하고 대원을 훈련시켰으며, 군량과 무기를 조달하고 수시로 왜적을 기습공격하여
교란시켰다. 1906년에는 호서의병과 제휴하여 각처에 모여든 200여명의 덕유산의병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데 협력하였으며, 전북 장수, 무주, 고창등의 전투에서는 적 수십명을 사살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1908년 무주 구천동 삿갓골 전투에서는 호서의병및 덕유산의병과 연합작전을 펴 혁혁한 전과를 거둔 바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거명, 김권원의병이 전사하는등 피해도 컸다. 특히 1909년 11월 전북 장수군 계북전투에서는 유춘일의병이 전사하고 박화기 아장은 총상을 입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히 박화기 아장은 함께 참여한 동생 박수기의 부축을 받고 집에 돌아와 치료받을 수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일제의 정탐군 최고미가 이를 밀고하여 박화기, 박수기 두 형제는 전북 무주수비대에 피체되었고, 폭도협의로 그해 11월 16일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에서 일제의 총격에 의해 순국하였다. 최고미의 밀고행위는 계속되어 1909년 12월 7일에는 하일청의병이 적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3년 후인 1912년 4월 26일 적은 다시 정탐꾼 최고미를 월성에 잠입시켜 의병의 행적을 내사케 했다. 이에 동민은 불안에 떨게 되었고 치미는 분노 또한 억제할 길이 없었다. 결국 동민은 정탐꾼을 찾아내어 만산별관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곧 적은 월성에 대거 출동하여 전 동민을 모아놓고 혹독한 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동민은 노소를 막론하고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동민이 집단타살했다. 그 이유는 그가 무고한 사람들을 모함하여 피살케 하였으니 용서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했고, 마을의 안정과 남은 의병들의 생명이 촌각에 다쿠는 상황이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박민기의병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사감으로 한 단독소행이다. 내가 드를 죽인 뒤에 군중이 모여든 것이다. 동민은 나를 구출하기 위한 동정심에서 거짓말을 했다"라고 크게 외쳤다. 동민은 물론 적까지도 아연실색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의 행위는 은폐되었고 동민은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민기 의병은
1912년 9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십년형의 선고를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그는 모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40년 1월 16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한채 영원히 잠들었다. 대한민국정부는 박공삼형제에게 2002년 8월 15일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화기, 박수기, 두의사가 순국한지 94년 박민기 의사가 출옥한후 영면한지 64년이 되는 광복 59주년의 해를 맞아 문중의 충심어린 협조와 관계당국의 후원으로 추모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유서깊은 이곳에 사적비를 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