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환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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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145
탐방로그
이 사적비는 이주환 의사(義士)의 우국정신을 길이 빛내기 위해 뜻있는 거창 군민들이 세운 것이다. 1995년 이주환 의사 순절 75주년과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고 소매속에 가지고 있던 자귀로 목을 찍어 순절하니 참으로 장렬하도다. 이때가 기미년 정월 초하루였고 향년 66세이다. 왜경의 급보로 일가 문중이 급히 정자에 가니 백일도 빛을 잃고 하늘이 눈을 내렸으니 천지신명도 의사의 순절을 애도했음인가 반구할 때 원근에서 조문통곡하는 사람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만장과 제문이 권질을 이루었으며 정월 15일 성인봉 아래 곤좌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78군의 선비들이 운집하여 그 묘에 조선의사 합천이공의 묘라고 썼다. 장사를 지낸 뒤에 사람이 발기하여 성암사라는 사당을 세워 두 선생과 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장판각을 세워 연제 선생의 유사 및 문집의 판본을 소장하였으니 이는 모두 항일정신에서 비롯된 誠心所到(성심소도)였다. 배위는 영천이씨인데 공보다 먼저 돌아갔고 사위는 박노학 최병환 이애원이며 아우 태환의 아들 제기를 계자로 삼았다. 공은 천부의 재능을 타고났고 또 위기의 바른 학통을 배워 벼슬없는 선비로서 충성이 금석을 꿰뚫었고 나라가 무너지고 주상의 붕어를 당하여 죽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우국단충을 깨닫게 하고 3.1독립운동의 촉진제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미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공이 순절한지 근 80년이 된 지금 광복 50주년을 맞아 향당 사림과 지방 유지 제언의 衷心捐助(충심연조)와 당국의 특전으로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침류정 경내에 사적비를 세우니 이 또한 후세사람들이 의사를 추모하는 길이리라 나에게 와 비문을 청한 사람은 추모사업추진원회와 합천이씨 문중이다. 원래가 단필이라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이에 행장과 묘갈 등을 참고하여 이와 같이 서문을 붙이고 명을 짓는다.
이 거창고을에 침류정이라는 정자 있어 의사의 핏자국이 천추에 길이 남으리라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여 죽어서도 인륜의 모범이 되었으니 열열한 그 정신은 일월과 빛을 다투누나. 한수레타고 저승길로 선사와 함께 돌아가 천하의 참된 도리 세우니 빛나고 빛나는 업적이로다. 정부에서 늦게나마 건국훈장 애국장을 드리고 선비들 輿論嚴正(여론엄정)하여 이 우뚝한 비를 세우도다. 내 붓 阿諂(아첨)함이 없이 크게 넓게 여기 새기노니 의리를 배반한 모든 무리들 여기 지나면서 이마에 땀을 흘리리라

광복 후 첫 을해년 윤 8월 일 합천이씨 문중에서 우리말로 옮기다.
파리장서비 옆 한일합방과 일제에 항거하다 순절한 연호 이주환 의사 사적비.
連湖 李義士 事蹟碑(연호 이의사 사적비)
이주환 의사 사적비(李柱煥 義士 事蹟碑)
본향(本鄕)은 합천(陜川)[또는 강양(江陽)]이며 호(號)는 연호(連湖)이다. 1854년 거창군, 주상면 연교리에서 태어나 8세 때 한학에 입문 소학과 충효의 도를 익혔으며, 1910년 5월 일제강점기에 납세 거부 운동을 펴다 일본 관헌(官憲)에게 잡혀가 협박 끝에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게 되자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잘랐다.
또한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가 원통하게 세상을 떠나자 8일 후인 1월 30일 선영에 성묘를 마치고 주상면사무소를 찾아가 자신의 민적(民籍)을 찢은 뒤 이곳 침류정(流流亭)에서 절세 시 한 수를 남기고 자귀로 목을 쏘아 자결하였다.
이 의사(義)는 절세 시에서 "나라도 임금도 없는 외로운 백성, 슬프게 바라우는 가련한 정이 로다. 삼천리 강토가 비록 넓다고 하나, 70늙은이는 떳떳하게 다닐 수 조차 없구나(중략), 지하에서 우리 임금 모실 것을 맹세하노라"라 하였다.
이 사적비는 1995년 봄 이 의사(義士)의 우국정신을 길이 빛내기 위해 뜻있는 거창 군민들이 "이주환 의사 순절사적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 의사 순절 75주년을 맞아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하였다.
거창군수
連湖 李義士 事蹟碑(연호 이의사 사적비)
連湖 李義士 陜川李公 事蹟碑銘(연호 이의사 합천이공 사적비명)
연호 의사는 전통있는 가문의 교훈을 이어받고 일찍이 스승의 문하에서 배워 평생에 실행한 것이 오직 의리에만 專心致志(전심치지)하고 나라가 무너지는 날을 당해 죽음으로써 군국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니 참으로 見危致命(견위치명)하고 視死如歸(시사여귀)하고 殺身成仁(살신성인)하며 不事二君(불사이군)한 선비라 할만하다. 공의 휘는 규환이요 자는 인팔이이며 연호가 그 호인데 합천이씨로 신라 개국공신 휘 갈평이 시조이다. 신라 말엽에 휘 개가 강양군으로 봉해져 자손들이 본관으로 삼았으니 강양은 곧 지금의 합천이다. 이로부터 고학과 숭덕이 대대로 이어졌고 조선조에 들어와 휘 연기는 벼슬이 사직이었으며 여러대로 내려와 휘 방주는 학생이 매우 높고 벼슬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공의 5대조이다. 고조는 휘 인배요 증조는 휘 석태요 조는 휘 우제요 고는 휘 병연 호 월간이며 효행이 있었고 사인 연안 이지찬의 따님과 혼인하여 철종 갑인년 서기 1854년 11월 23일 거창부 북녘 연교리 본제에서 공을 낳으니 어릴 적부터 언행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8세때 소학을 읽으면서 충효가 특이한 구절에 이르면 무릎을 치면서 여러 번씩 반복하였으며 점점 장성함에 연제 송병준과 심석 송병순 두 선생을 사사하고 인의의 학설을 듣고 정성껏 지켰다. 어버이께서 효도하는 것을 타고난 천성으로서 월간공이 병환이 있으매 백방으로 간병해도 효력이 없고 다만 찬얼음을 원했는데 한 여름이어서 공이 도장동 음지 깊은 굴속에 들어가 울부짖다가 얼음을 얻어 아버님께 드리니 남들이 천우신조의 일이라 칭하면서 옛날 왕상이 한겨울 얼음 속에서 잉어를 얻을 일에 견주었다. 양친의 상을 당해서는 애훼함이 예제보다 지나쳤고 3 년동안 피눈물을 흘려 상복이 썩을 지경이었다. 오호라 나라의 운수가 막히고 왜놈들이 마구 날뛰어 마침내 천지가 뒤집히는 큰 국난을 당하자 두 스승님의 순절하니 공은 戴星之行(대성지행)의 지성으로 달려가 통곡으로 加麻九月(가마구월)하였으며 삭망에도 반드시 參奠(참전)하였다. 종상 후에는 기제 때마다 進參(진참)하고 원로 하늘의 魔障(마장)에도 빠진 일이 없었다. 그때 왜놈들의 침탈이 더욱 심해지고 징세가 가혹해지니 공은 결사항거하여 세금을 내지 않았고 왜정의 주구가 억지로 무인을 찍게하니 萬折必東(만절필동)이라 대갈하고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선사의 종상 때까지 참고 지내면서 사소를 엿보고 있었으나 육친마져 눈치채지 못했다. 무오년 12월 21일에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자 공은 변을 듣고 문도들을 이끌고 교외에 나가 망곡하였으며 그 후로는 杜門不出(두문불출)하다가 그음날 밤에는 면사무소에 가서 自家民籍(자가민적)을 열람하고 찢어내어 불태웠으니 이날이 국상의 성복날이었다. 이날 밤 군청으로 가서 군수를 만나려고 했으나 충지를 이루지 못하고 신명에 침류정에 올라 北向痛哭(북향통곡)하고 시를 지어 벽에 쓰기를 나라도 임금도 없는 외로운 백성 슬프게 바라우는 가련한 마음이로다. 삼천리 강토가 비록 넓다고하나 70늙은이는 떳떳하게 다닐 수조차 없구나. 서산에서 캐는 고사리는 눈에 자주 푸르렀고 동녘 바다솟는 달은 마음을 비추어 밝았도다. 그지없는 통한을 어디에다 하소하야. 지하에서 우리 임금 모실 것을 맹세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