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829-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선생은 경주인으로 서기 1891년 신묘 정월 초7일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시니 신라말의 문호 고은 최치원 선생의 29세손이요 한말 충신 대유인 순국선열 면암 최익현 선생의 현손으로 호는 염재, 자는 경소 휘는 면식이시다.
선생께서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비분강개하여 국외로 망명 국권회복을 위하여 수시로 국내에 잠입하시며 군자금 및 무기 조달에 전념하시다가 해주 서대문 등 형무소에서 수차 옥고를 치르시었다. 1918년엔 광복단 조직을 위하여 기호지방에서 활동하
선생께서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비분강개하여 국외로 망명 국권회복을 위하여 수시로 국내에 잠입하시며 군자금 및 무기 조달에 전념하시다가 해주 서대문 등 형무소에서 수차 옥고를 치르시었다. 1918년엔 광복단 조직을 위하여 기호지방에서 활동하
시다가 만주로 건너가 백야 김좌진 장군 박상진 의사 노백린 장군 채기중 의사 등과 우의를 나누는 한편 동지 규합과 군자금 조달차 국내로 잠행 각지를 순회 중 목포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2년 유여의 옥고를 치르시고도 초지일관 만주로 탈출 활약하시었다. 1921년 다시 밀입국하시었다가 공복단 사건으로 대전에서 체포되어 일제의 공주형무소에서 무기수로 옥고 중 형독의 악화로 출옥 수년간 병석에서 신음하시니 선생께서는 일생을 재가무일 오직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불철주야 국내외로 활약하시다가 해주 서대문 공주 등 형무소에서의 형장지고와 형속지난에도 불구하시며 결사불복하시니 구절일소지화를 당하시어 만신혈흔이요 전체종고라 비천공재여 인가언야리요. 오호애라 선생은 1944년 갑신 7월 초 3일 끝내 침상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은 못본 채 한 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향년이 오십유사이시었다. 정부에서는 1977년 12월 13일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1980년 8월 14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우리는 조국광복과 국권회복을 위하여 한 많은 생을 살다 가신 선생의 넋을 기리며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에 이 공적비를 세워 후세에 그 뜻을 전하고자 한다.
서기 1982년 임술 8월 15일 광복회장 김상길 근찬 전주후인 이백교 근서
서기 1982년 임술 8월 15일 광복회장 김상길 근찬 전주후인 이백교 근서
염재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수립코저 수년전부터 준비하여 오던 중 포천군수의 특별한 배려와 유지 제현의 정성어린 뜻을 모아 포친군민의 이름으로 삼가 이 비를 세웁니다.
서기 1982년 임술 중복
포천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건립위원회 위원장 이명우 근수
서기 1982년 임술 중복
포천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건립위원회 위원장 이명우 근수
염재 최면식 선생 공적비 GPS상의 주소는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829-3이다.
최면식 선생 공적비
이 공적비는 독립지사 최면식(1891 - 1944) 선생이 항일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와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 출생지에 공원을 조성, 건립한것이다. 선생은 면암 최인현의 현손으로 호는 염재, 자는 경소, 본관은 경주이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국외로 망명, 국권회복을 위해 수시로 잠입하여 군자금 및 무기조달에 전념하다가 체포, 서대문경찰서에서 여러차례 옥고를 치렀다.
1916년 광복단 조직을 위해 기호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 박상진, 노백린, 채기중 등과 우의를 다졌다. 선생은 독립운동의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했다가 목포에서 피체, 2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나 이후 만주로 탈출, 초지일관 활약했다. 1921년 재일입국했다가 광복단사건으로 대전에서 피체, 무기수로서 공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형독악화로 출옥한 뒤 순국했다. 1977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장,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 공적비는 독립지사 최면식(1891 - 1944) 선생이 항일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와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 출생지에 공원을 조성, 건립한것이다. 선생은 면암 최인현의 현손으로 호는 염재, 자는 경소, 본관은 경주이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국외로 망명, 국권회복을 위해 수시로 잠입하여 군자금 및 무기조달에 전념하다가 체포, 서대문경찰서에서 여러차례 옥고를 치렀다.
1916년 광복단 조직을 위해 기호지방에서 활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 박상진, 노백린, 채기중 등과 우의를 다졌다. 선생은 독립운동의 사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했다가 목포에서 피체, 2년여의 옥고를 치렀으나 이후 만주로 탈출, 초지일관 활약했다. 1921년 재일입국했다가 광복단사건으로 대전에서 피체, 무기수로서 공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형독악화로 출옥한 뒤 순국했다. 1977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장,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지사 염재 최선생 공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