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 신둔면의거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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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 414
탐방로그
기미독립선언 신둔면의거기념비는 경기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 414 신둔면생활체육공원에 있다. 이전에 신둔면 면사무소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거 7위 지사
서기창 27세, 신둔면 수하리, 독립만세 선창, 보안법위반, 징역1년, 서대문 감옥
이상혁 27세, 신둔면 수하리, 독립선언서 낭독, 보안법위반, 징역1년, 서대문 감옥
김영익(金永益) 35세, 신둔면 수하리, 사발통문 작성, 보안법위반, 태형90도
이치조 44세, 신둔면 도암리, 호적 모의 동참, 보안법위반, 유치 고문, 이천헌병대
송면호 25세, 신둔면 남정리, 모의 동참, 보안법위반, 유치 고문, 이천헌병대
권중효 25세 신둔면 남정리, 호적 모가면 동리, 모의 동참, 보안법위반, 징역1년, 서대문감옥
김순철(金順喆) 24세, 백사면 현방리, 포교차 내왕, 모의 동참, 보안법위반, 유치 고문, 이천헌병대

註 징역형은 1919년 기미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언도 불복하였으나 동년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거듭 상고하였으나 동년 8월 14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최종기각 확정됨
기미독립선언 신둔면 의거 66주년을 맞이하야
서기 1985년 을축 4월 2일 신둔면 한천회 근립
협찬 면내 단체 도암회 신월친목회
단위농업협동조합 반공연맹청년회 새마을남녀지도자협의회
새마을영농기술자회 교회연합회 기업체친목회 낙우회 면사무소직원상록회
이장단 친목회장 미도회 방우회 신암회 일심회 천덕친목회
경기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414 신둔면생활체육공원
우리 이천시 신둔면은 명상인 원적산맥을 이어온 아주 살기좋은 고장입니다.
우리 신둔면에는 옛부터 충신, 효자, 효부가 많이 배출된 고장입니다.
한천회에서는 여기 양지 바른 곳에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신둔면 내에 산재되어
모셔져있던 3.1운동기념비 의병장비, 6.25의혼탑, 공덕비, 열녀, 효자비를 한 곳에
모셔서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추모공원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추모공원을
조성 건립하기 위하여 많은 협조를 하여주신 조병돈 시장님, 정명교 면장님,
김문자 시의회의원님, 김동일 신둔농협 조합장님, 관내 사회단체 외 면민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신둔면에는 충, 효, 예, 의, 덕을 쌓는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원합니다.

2011년 12월 20일 한천회 회원 일동

회장 : 서상수, 사무장 : 김익화, 감사 : 김의수 이경복, 운영위원 : 김학래 한대수 유세영, 고문 ; 김정식 유준열 김종철 이광호, 자문위원 : 나기창 송영진 이영배 김형식 김창호 한춘수, 회원 : 박선기 김학천 조성열 허동 지창현 이병희 김진섭 김동현 전태진 한필수 조학행 김영철 한광수 이진규 김명식 홍성욱 정태홍 윤연상 김동일 오원영 조광희 유대현 김춘기 조재춘 김용주
己未獨立宣言 新屯面 義擧 紀念碑(기미독립선언 신둔면 의거 기념비)
일제는 명치유신 이래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군국주의로 급성장하여 마침내 청일 노일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동양은 그들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한말에 우리 국운이 극도로 쇠약하고 수구와 개화의 국론이 분분함을 틈타서 대륙침략의 야욕을 품고 무력을 앞세워 온갖 위협을 다하야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마침내 우리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뿐만 않이라 외교권마저 박탈하고 심지어는 명성황후 민비를 시해하였고 급기야 1910년 경술에 이르러서는 우리 강토를 강제 병합하여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사직은 일제식민지가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겨례의 비분을 말로다 형언할 수 있으랴. 기후 총독부를 두어 혹독한 무단정치로 민족 고유 문화의 말살과 경제적인 수탈을 자행하여 2천만 생령을 금수와 같이 다루었다. 또한 고종황제마저 독살하는 만행을 거듭하였음에 이르러 전국민의 원한과 울분은 터지고 말았다. 고종황제의 인산일이 3월 3일로 정해지자 1919년 기미월 1일을 기하여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탑동공원에 운집한 군중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웨치며 시위행진을 하자 이날의 의거는 요원의 불길처럼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우리 고장에서도 7지사가 주동이 되어 이천장날인 4월 2일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결행키로 모의 극비밀리에 사발통문으로 남녀노유를 이천장터로 동원하였으나 일제관헌들의 경계가 너무도 삼엄하여 장소를 신둔면사무소 앞으로 다시 변경하고 약 3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만세시위를 단행한 바 당시 내주하던 행인들까지도 동참하였으며 더우기 차내에 타고 있던 일본인까지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으니 일대쾌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로서 이천군내에서는 유일하게 우리 신둔면이 기미독립만세 시위를 하게 된 것이다. 시위가 노도와 같이 절정에 이르자 이에 당황한 일제헌병들이 출동함에 죽음을 무릅쓰고 적수공권으로 저항하였다. 그 익일부터 일제헌병들은 면내를 샅샅이 수색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검거한 후 곤장을 치고 불로 지지며 차마 인간으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한편 주모 7지사는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각기 처벌되었으며 대부분은 심한 고문과 옥고로 인하여 젊은 나이로 천추의 한을 남기고 호국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춘풍추우 66개 성상이 지나도록 엄연한 독립투쟁 의거사실이 알려지지 못한 것은 심히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시지감은 있으나 이제 이 의거사실을 오래 기념하고 후세 자손들에게 조상의 애국충절에 대한 얼을 계승케하기 위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이 기념비를 건립하는 바이다. 7위 지사 영령이시여 고이 잠드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