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659-2
- 탐방로그
- 애국지사 오의선 선생 생가와 용인독립운동유적 안내판을 찾기 위해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659-2에 왔다. 생가 앞에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고등경찰요사』에는 주소가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죽능리 668’로 기록되어 있고, 공적조서에는 본적이 죽능리 669번지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오명근 씨는 현재의 죽능리 659-2번지에서 오의선이 출생하여 중국으로 가기 전 669번지로 살림을 내서 잠시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증언을 토대로 국내에서 대부분의 기간을 살았던 659-2번지를 생가 및 집으로 비정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오의선 선생 생가
오의선은 1889년 태어나 메이지대학 중 1919년 2월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향리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1년 베이징에서 박용만이 독립자금을 모금을 한 흥화실업은행의 주식 모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뒤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등으로 근무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활동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공산당사건으로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가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후 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1년 3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3년형을 받고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5월 6일 옥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손자인 오명근씨의 증언을 토대로 국내에서 대부분의 기간을 살았던 생가지로 659-2번지를 생가 및 집으로 비정하였다.
오의선은 1889년 태어나 메이지대학 중 1919년 2월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향리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1년 베이징에서 박용만이 독립자금을 모금을 한 흥화실업은행의 주식 모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뒤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등으로 근무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활동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공산당사건으로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가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후 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1년 3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3년형을 받고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5월 6일 옥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손자인 오명근씨의 증언을 토대로 국내에서 대부분의 기간을 살았던 생가지로 659-2번지를 생가 및 집으로 비정하였다.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659-2 생가 앞에
애국지사 오의선 선생 생가 용인독립운동유적 안내판이 건립되어 찾았다.
애국지사 오의선 선생 생가 용인독립운동유적 안내판이 건립되어 찾았다.
용인독립운동유적
애국지사 오의선 선생 생가
오의선은 1889년 태어나 메이지대학 중 1919년 2월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향리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1년 베이징에서 박용만이 독립자금을 모금을 한 흥화실업은행의 주식 모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뒤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등으로 근무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활동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공산당사건으로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가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후 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1년 3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3년형을 받고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5월 6일 옥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손자인 오명근씨의 증언을 토대로 국내에서 대부분의 기간을 살았던 생가지로 659-2번지를 생가 및 집으로 비정하였다.
오의선은 1889년 태어나 메이지대학 중 1919년 2월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향리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1년 베이징에서 박용만이 독립자금을 모금을 한 흥화실업은행의 주식 모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뒤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등으로 근무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활동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공산당사건으로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가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후 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1년 3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3년형을 받고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5월 6일 옥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손자인 오명근씨의 증언을 토대로 국내에서 대부분의 기간을 살았던 생가지로 659-2번지를 생가 및 집으로 비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