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수 3대 독립항쟁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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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32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땅 한모퉁이 터를 다지고 비로소 돌을 다듬어 비를 세울진데 님들의 구국애정은 산고수결(山高水潔)에 비할 수 없고 3대를 이은 의절(懿節)은 그 불후(不朽)함 짝할 것이 없나니 이곳을 지나는 초부목동(樵夫牧童)인들 어찌 선열의 숭고한 공덕을 잊으리오.

전 용인문화원장 소설 수필 향토문화사학가 이인령 근찬
해주오씨호군공파 용인시원삼면대종회회장 오민근
고문 일영 민영 훈근 형근 시준
부회장 광선 명근 좌근 창근
감사 용근 건환
총무 수환
서무 주환
재무 민근
서기2003년(광복63주년) 11월 17일 立 순국선열의 날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327 어현마을 입구 의병장 해주 오공인수 3대 독립항쟁 기적비
의병장 해주오공 인수 3대 독립항쟁기적비
의병장 오인수, 아들 오광선, 손녀 오희영과 오희옥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 있다.
아들 오광선은 만주에서 무장 독립군으로 활동했으며 오광선의 장녀와 차녀인 오희영, 오희옥도 청년공작대에서 활약했다.
오광선 선생은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묘역 36에 애국지사이신 부인 정정선과 같이, 또 147번에는 장녀이신 오희옥 여사가 부군이신 애국지사 신송식 선생과 같이 합장되어있다.
義兵將海州吳公寅秀三代獨立抗爭記蹟碑(의병장 해주오공 인수 3대 독립항쟁 기적비)
선생의 휘는 인수(寅秀)이시며 자 경수(敬壽)이시고 관향은 해주이시니 시조는 고려검교 정승(正丞) 휘 인유(仁裕)이시고 좌령호군 휘 희보(希保)의 14세손이며 파조처사공 휘 윤충(允忠)의 8세손이시다.
고종5년 무진 2월 2일 양지군 원삼면 죽릉리 어동에서 부친 휘 태한의 3남으로 출생하어 성장한 후 유인 안성이씨와의 사이에 4남매를 장남은 휘 광선(光鮮)이요 장녀는 휘 태순(泰順)이며 차남은 휘 건성(乾成)이고 차녀는 휘 언년(言年)이다. 선생께서는 유년시부터 활달호방하여 사냥을 즐겼으며 18세부터는 화포계에 참여하고 용인 안성 죽산 여천 등지에서 선생의 솜씨를 따를 사람이 없는 명포수로 이름이 높았다.
광무9년 마침내 일본과의 을사늑양이 체결되자 약소민족의 울분을 참지 못한 선생께서는 빼어난 사격솜씨로 구국전선에 뛰어들어 의병장 정원욱선생과 용인출신 정철화의병장과 합세한 후 중군장을 맡아 양지 죽산 안성 등지의 일본군 헌병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혁혁한 대일항쟁을 전개하던중 안성군 매봉재 전투에서는 일본군 1개대대와 일주야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치루었으나 최신의 장비로 무장된 일본의 정예군을 부족한 식량과 열세한 화력으로 어찌 당할수 있었으리오 마침내 의병의 주력은 속속 기세를 잃고 대세가 기울어져 뿔뿔이 흩어지니 선생꼐서는 빈 총을 메고 충견과 함께 산야를 헤메이며 풍찬노숙하다가 지친 몸으로 야음
을 틈타 죽릉리 어동의 자택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신출귀몰하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던 왜경의 거미줄같은 포위망과 주변에 잠복시켰던 일본주구의 정탐에 의하여 밀고되기에 이르자 당시 일진회 회장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이 이끌고 온 토벌대에 체포된 후 온갖 고문과 악행을 당한 끝어 서대문형무소에서 8년간의 옥고를 치루시었고 1920년 12월 만주로 망명하신 후에는 중국 통화현 흡니하(洽泥河) 남만주 신흥무관학교에 다니던 장남 광선과 합류하면서 광선이 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 제1대장을 시발로 항일전선에 나서자 부자가 함께 독립투쟁을 계속하였을뿐만 아니라 아들 광선이 이청천 등과 함께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광선의 처는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장녀인 희영과 그의 남편 신송식은 한국청년정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와 광복군에서 차녀 희옥은 한국광복연선(連線) 청년공작대와 광복군제5지대에서 활약하는 등 선생으로부터 손녀에 이르기까지 3대를 이어 항일독립투쟁에 이바지하여 청사에 빛나는 장한 업적을 남기시니 이러한 예는 독립투쟁사상 찾아보기 힘든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장남 광선은 광복후 제2훈련소장과 대전병사국사령관을 역임하고 육군준장으로 예편하였으나 그러나 선생께서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시지 못한채 1935년 1월 23일 67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시어 이국 하늘 아래 불귀의 넋이 되시었다. 오호라 광복 반백년이 지나도록 선생일문의 빛나는 공적이 기려지지 못해왔음을 실로 안타깝게 여겨왔더니 작금에 이르러 한일간의 역사를 왜곡 기술하는 등 방만불손한 일본극우 잔존세력들의 식민사관에 온 국민이 분노하는 때를 당하여 님들의 애국독립정신이 이 강산에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온 천하에 밝히고 이를 후세에 전하고자 해주오씨 호군공파 용인시 원삼면 대종회 회장 이하 종원의 일치된 의견을 모아 이에 비를 세우고 명(銘)하노니 오호라 장하시도다 선생일문의 구국정신과 애국애정은 이 산하를 덮고도 넘치는도다. 공의 대성존명(大姓尊名) 청사에 빛나시니 그 큰뜻 만분의일이나마 헤아려 돌에 새김이 마땅하도다. 이곳은 선생께서 태어나신 곳 나라에 흥망은 있었으도 산천은 예대로 의구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