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 52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공의 자는 중옥(重玉) 서기 1897년 정유 12월 12일 파담 502번지 출생이시며 유시를 여기서 지내셨고 서울에서 성장 3.1운동에 수원, 용인, 안성 일원에서 활약 기 직후 사양의 국운과 가사를 등지고 중국 망명 후에 의열단원으로 활약하셨다. 군자금 모집차 암입국 하였다가 모반자 이인희의 밀고로 김시인 등
과 같이 피첩 투옥되여 8년 옥고 후 재망명 천진에서 8.15 해방을 맞자 동포 귀국에 극력노력 주선하시며 각종 고난을 당하시고 귀국하셨으나 당시 혼란정국과 빈한 등으로 극도의 인내생활을 하셨다. 염원하던 조국광복은 미비나마 이루워졌다 하나 반평생 이상의 투쟁에 비하여 기 노후 여생은 미흡함이 많았다. 연이 나이는 아마도 공 평생의 소원이였으라. 서기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으셨고 1967년 1월 29일 서울 이도동 295번지 만거에서 한많고 파란 많은 생애를 종결지으셨다. 광복회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34호에 안장되셨으니 기 묘비 이기에는 「의열단원으로 일기관 고관 암살 파괴 자금모집 활동 일제 피첩 옥고」라는 기록이 있다.
과 같이 피첩 투옥되여 8년 옥고 후 재망명 천진에서 8.15 해방을 맞자 동포 귀국에 극력노력 주선하시며 각종 고난을 당하시고 귀국하셨으나 당시 혼란정국과 빈한 등으로 극도의 인내생활을 하셨다. 염원하던 조국광복은 미비나마 이루워졌다 하나 반평생 이상의 투쟁에 비하여 기 노후 여생은 미흡함이 많았다. 연이 나이는 아마도 공 평생의 소원이였으라. 서기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으셨고 1967년 1월 29일 서울 이도동 295번지 만거에서 한많고 파란 많은 생애를 종결지으셨다. 광복회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34호에 안장되셨으니 기 묘비 이기에는 「의열단원으로 일기관 고관 암살 파괴 자금모집 활동 일제 피첩 옥고」라는 기록이 있다.
배 해주오씨 순복, 남 천희 건희 성희 대희, 부 팔원, 제 정진 정칠 정목
서기 1990년 5월 일 삼종제 정렬 근표서
용인군향토사학회 협찬
서기 1990년 5월 일 삼종제 정렬 근표서
용인군향토사학회 협찬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 523 남정각지사 유허비에 안내판이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용인 독립운동 유적
남정각 지사 유허비
남정각 지사 유허비
[용인 독립운동 유적] 남정각 지사 유허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갈담리 523 파담마을
이곳은 독립운동가 오산 남정각(南廷珏, 1897~1967) 지사의 생가 터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장춘·텐진 등지를 순력하였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김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의 수입준비를 진행하던 중 김한이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해 텐진으로 가 독립운동비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유시대·유병하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 서울 이인희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출감 후 다시 텐진으로 망명하여 텐진교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가 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종로라는 설이 있었지만, 지사의 종형제 고 남정렬 씨와 동생 남정휴 씨의 증언으로 이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갈담리 523 파담마을
이곳은 독립운동가 오산 남정각(南廷珏, 1897~1967) 지사의 생가 터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장춘·텐진 등지를 순력하였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김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의 수입준비를 진행하던 중 김한이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해 텐진으로 가 독립운동비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유시대·유병하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 서울 이인희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출감 후 다시 텐진으로 망명하여 텐진교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생가 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울 종로라는 설이 있었지만, 지사의 종형제 고 남정렬 씨와 동생 남정휴 씨의 증언으로 이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이 지사의 생가 터라고 한다.
이는 경기도에서 건립한 갈담리 502-8의 집터 안내판과 서로 상반된 내용이다.
이는 경기도에서 건립한 갈담리 502-8의 집터 안내판과 서로 상반된 내용이다.
대한독립투사 의령남공 호 오산 휘 정각 유허비 아명 영득
대한독립투사 의령남공 호 오산 휘 정각 유허비 아명 영득
공의 자는 중옥(重玉) 서기 1897년 정유 12월 12일 파담 502번지 출생이시며 유시를 여기서 지내셨고 서울에서 성장 3.1운동에 수원, 용인, 안성 일원에서 활약 기 직후 사양의 국운과 가사를 등지고 중국 망명 후에 의열단원으로 활약하셨다. 군자금 모집차 암입국 하였다가 모반자 이인희의 밀고로 김시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