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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354
- 탐방로그
- 심원사 의병 주둔지 안내판을 찾기 위해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354에 왔다. 심원사 안내판 옆에 해당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의병 운동 당시의 사찰은 소실되었고, 한국전쟁 때 재차 소실되었다가 2000년 심원사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기도 항일독립운동 유적 심원사 의병 주둔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동내로 970번길 32-268
심원사 의병 주둔지는 연천,철원 지역 의병들이 거점으로 삼고 주둔했던 곳이다. 1907년 9월 25일에 의병 800여 명이 심원사에 주둔하자 정보를 입구한 일제 김화수비대는 26일 밤에 각 방면에서 사찰을 포위한 채 공격해 왔다. 의병들은 27일 오전 3시에 법화동 전투와, 오후 3시에 대광리 전투를 벌였지만 화력의 열세로 1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심원사에 있던 의병 300여 명이 일본군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의병부대의 은거지 역할을 하던 심원사는 이후 일본군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전소되었다.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동내로 970번길 32-268
심원사 의병 주둔지는 연천,철원 지역 의병들이 거점으로 삼고 주둔했던 곳이다. 1907년 9월 25일에 의병 800여 명이 심원사에 주둔하자 정보를 입구한 일제 김화수비대는 26일 밤에 각 방면에서 사찰을 포위한 채 공격해 왔다. 의병들은 27일 오전 3시에 법화동 전투와, 오후 3시에 대광리 전투를 벌였지만 화력의 열세로 1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심원사에 있던 의병 300여 명이 일본군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의병부대의 은거지 역할을 하던 심원사는 이후 일본군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전소되었다.
연천심원사지
심원사(深源寺)는 신라 진덕여당 원년(657)에 영원조사가 영주산(현 보개산)에 흥림사를 창건한 것이 시초였다. ..중략..순종 융희 원년(1907) 을미의병이 봉기할 당시 심원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일본군 수비대 김화수비대의 기습공격으로 250칸의 사우와 1,602위의 불상이 소실되고 말았다. 1909년부터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1936년에는 승려의 교육을 위한 근대적 강원인 화산경원이 설립되어 한국 근대 불교의 중흥을 이끌어 가던 경기북부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 거듭나게 되었다. 1942년에 편찬된 유점사본말사지 제5말사편의 '심원사지'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심원사는 12곳의 암자와 32위의 탱화, 1609위의 불상, 탑2기, 250간의 당우를 갖추었고 사찰내에 천불전, 봉향각, 산신각, 객실 등의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전화를 비껴가지 못하고 사찰은 다시 한 번 소실되고 말았다...후략..
심원사(深源寺)는 신라 진덕여당 원년(657)에 영원조사가 영주산(현 보개산)에 흥림사를 창건한 것이 시초였다. ..중략..순종 융희 원년(1907) 을미의병이 봉기할 당시 심원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일본군 수비대 김화수비대의 기습공격으로 250칸의 사우와 1,602위의 불상이 소실되고 말았다. 1909년부터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1936년에는 승려의 교육을 위한 근대적 강원인 화산경원이 설립되어 한국 근대 불교의 중흥을 이끌어 가던 경기북부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 거듭나게 되었다. 1942년에 편찬된 유점사본말사지 제5말사편의 '심원사지'기록에 따르면 당시의 심원사는 12곳의 암자와 32위의 탱화, 1609위의 불상, 탑2기, 250간의 당우를 갖추었고 사찰내에 천불전, 봉향각, 산신각, 객실 등의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전화를 비껴가지 못하고 사찰은 다시 한 번 소실되고 말았다...후략..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354 심원사 안내판 옆 심원사지 의병 주둔지 안내판
경기도 항일독립운동 유적
심원사 의병 주둔지
심원사 의병 주둔지
경기도 항일독립운동 유적 심원사 의병 주둔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동내로 970번길 32-268
심원사 의병 주둔지는 연천,철원 지역 의병들이 거점으로 삼고 주둔했던 곳이다. 1907년 9월 25일에 의병 800여 명이 심원사에 주둔하자 정보를 입구한 일제 김화수비대는 26일 밤에 각 방면에서 사찰을 포위한 채 공격해 왔다. 의병들은 27일 오전 3시에 법화동 전투와, 오후 3시에 대광리 전투를 벌였지만 화력의 열세로 1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심원사에 있던 의병 300여 명이 일본군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의병부대의 은거지 역할을 하던 심원사는 이후 일본군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전소되었다.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동내로 970번길 32-268
심원사 의병 주둔지는 연천,철원 지역 의병들이 거점으로 삼고 주둔했던 곳이다. 1907년 9월 25일에 의병 800여 명이 심원사에 주둔하자 정보를 입구한 일제 김화수비대는 26일 밤에 각 방면에서 사찰을 포위한 채 공격해 왔다. 의병들은 27일 오전 3시에 법화동 전투와, 오후 3시에 대광리 전투를 벌였지만 화력의 열세로 1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심원사에 있던 의병 300여 명이 일본군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의병부대의 은거지 역할을 하던 심원사는 이후 일본군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전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