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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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산13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같이 20년동안 배양한 저력이 있었기에 동학운동은 마침내 농민대중을 이끌어 포덕35년(1894녀)의 갑오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청일양국의 무력간섭으로 성공 직전에 실패하고 포덕35년(1898년) 해월신사 또한 순교 하시고 말았다 하지마는 두 분 교조계서 차례로 이 땅을 적신 순교의 혈맥은 포덕60년(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으로 다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영광된 대한민국 건국 정신의 원천이 되었으니 이 자리에 묻히신 스승님의 유훈 유덕은 정녕 이 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영생불멸 할 것이다
포덕121년(1980년)3월21일
문학박산 이선근은 글을 짓고 관암 양재환은 글씨를 쓰고 김한은 제자하고 해월신사묘비건립위원회의 주관아래 전체교인의 성금으로 삼가 이 비를 세우다
경기도 여주고을 이 산속에 묻히신 천도교 제2세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님은 포덕전33년(1827년) 신라의 고도 경주 황오리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5세에 어머님을 12세에는 아버님을 여의고 혈혈단신의 고아가 되어 하루 세끼 식생활을 유지하기도 매우 고달픈 신세였다. 하지마는 17세 때부터 비로소 제지소의 일꾼이 되어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한 결과 자립생활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19세에 밀양 손씨댁 규수와 결혼하여 성가하게 되니 날이 갈수록 더욱 근면 성실한 역량을 발휘하여 그 이름을 인근에 떨치고 남다른 소임도 맡아보게 되었다. 35세 되던 포덕2년(1861년) 한울님의 조화와 이치를 직접 수운대선사께 배워 깨닫기 위하여 동학교문에 들게된 바 밤낮없이 정진하는 이 분의 모습과 줄기찬 신앙생활은 어느덧 대선사의 눈길을 끌고 드디어 막중한 도통의 계승자로 지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뛰어난 선각자와 성인이 내세우는 진리의 교훈은 매양 억세인 거부반응과 시련을 겪는 것이 사실이라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천도를 외치며 온갖 수난 속의 농민대중을 신바람 나게 고무격려 하면서 민족적 차원의 인간혁명을 기도하고 제창하는 사민평등의 동학운동이 오백년 왕조 말기의 완명고루한 양반 권력층에서 용납될 리도 만무하여 위선 수운대선사가 포덕5년(1864년)에 억울하게도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피흘리고 순교하게 되니 동학교문 전체가 무자비한 탄압과 박해를 받고 얼핏 보아 재기불능의 괴멸상태에 빠졌다. 하지마는 이미 대선사의 도통을 계승한 해월신사만은 엄동설한을 맞이한 거목의 뿌리처럼 지하로 깊숙이 파고들어 교문의 소중한 문서 보따리를 둘러메고 계속 은밀한 포교 행각을 일심정력을 바칠지언정 결코 실망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각지에 숨어사는 열신동덕들을 두루 찾아 위로 격려 하는가 하면 후일의 포덕천하를 위한 기본대책을 용의주도하게 다져나가는 것이라 우선 대선사에게 물려받은 필사본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비밀리에 판각 간행하여 보급시키고 둘째는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라고 하는 새 윤리도덕의 본보기로 어린이와 부녀자의 인격부터 존중할 것을 강조하고 셋째는 누구나 근로정신을 발휘하여 유진무퇴할 것을 당부 하였다.
이같이 20년동안 배양한 저력이 있었...
해월신사의 가계
해월신사는 최고운선생의 후손으로서 부친은 종수요 모친은 배씨다 큰따님은 윤이요 사위는 정수현이다. 의암성사의 여동생 손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동희는 상해에서 고려혁명당의 당수로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환원하여 건국독립포장을 받았고 둘째 동호는 기미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 끝에 환원하여 건국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받다 동희는 부인 남양 홍씨 사이에 큰딸 문환 맏아들 익환 작은아들 진환을 두었는데 익환은 천도교 도정을 지냈고 부인은 홍창섭이며 아들 재홍 처 박진숙 재원 처 김덕순 재형 처 이혜용 재신 처 정순과 딸 정혜(차광수처) 경혜 영혜(이진봉처) 인혜를 두었고 현손이 많다.
해월 신사 부인 손시화 묘
해월신사 사모 손시화 여사 묘
경기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산138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 묘소와 그 아래쪽에 있는 애국지사 최동희의 묘를 찾아가고 있다.
최동희 선생은, 천도교 제2세교조인 해월신사 최시형의 맏아들이며, 건국훈장이 추서되신 분이시다.
천도교 제2세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묘소
(전방) 4Km
위쪽에 비석이 보이는데 올라가는 길이 보이질 않는다.
성혈사가 보인다. 무문관을 지나면 해월신사 최시형의 묘소로 가는 길이 나온다. 계속 가야한다.
장손자 최익환의 묘소가 먼저 나온다. 그 위로 아들인 최동희의 묘소도 보인다.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 묘
해월신사의 묘를 보기 위해서는 계속 가야한다
천도교 제 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 묘
향토유적 제 8호

최시형 선생 묘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산 138

최시형(1827-1898) 선생은 조선 말 동학의 제 2대 교주로서 초명은 경상, 호는 해월, 본관은 경주이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서에서 일하다가 철종 12년(1861) 동학에 입교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 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 용답유사 등의 동학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 조직을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고종 30년(1893) 이후 교조신원 운동에 전력했다. 선생은 당시 교조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시달했다. 그러나 고종 31년(1894), 전봉준(1855-1895)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제기포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 일보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되었다. 6월 5일 이종훈 등이 광희문 밖에 가매장된 시신을 수급, 밤길을 달려와 이곳에 장사지냈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