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선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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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산12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안내판에는 의병장 묘 옆에 애마를 묻었다고 되어있지만, 아무런 비석은 찾을 수 없었다.
항일의병장 김백선 장군 생애(1849.3.13~1896.3.27)
1849년 3월 13일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749번지 하갈마을에서 아버지 김국용의 4남 중 3남으로 태어남.
소년.성년기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으며, 용맹하고 명석했음. 이를 두렵게 여긴 부모님에 의해 용문사에 맡겨져 자람. 이후 윤씨와 혼인을 해 강원도 홍천 처가에 머물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함. 양평군 일대 산포수의 지도자가 되어 경기도와 강원도 등지를 무대로 명포수로 활약함. 포수들은 유사시에 관군으로 동원됨.
1894년 9월 26일 관군의 지휘 아래 포수들과 지평현, 홍천, 안성 일대의 동학군과 전투를 벌이다 홍천에서 크게 부상을 당함. 이후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의 자리에 오름.
1896년 1월 5일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지평 감역 맹영재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함. 그러자 포군을 모아 거병하기로 결심하고 포수들의 명단을 가지도 나옴. 화가 생기면 자결할 것을 다짐함. 이춘영이 찾아오자 함께 거병할 것을 결의함.
1896년 1월 10일 포수들을 모아 원주 안창에서 이춘영과 만나기로 약속함.
1896년 1월 12일 포수 4백여 명을 이끌고 안창으로 가 이춘영과 지평의병을 일으킴
1896년 1월 17일 지평의병, 제천으로 진을 옮김. 선봉장이 됨.
1896년 1월 22일 단양 장회협 전투에서 크게 승리함.
1896년 2월 3일 호좌의진의 선봉장이 됨.
1896년 2월 16일 충주성을 함락한 뒤 17일 간 머무름.
1896년 3월 19일 충주 가흥에서 일본군을 급습해 궤멸시킴. 일본군의 가흥창을 공격하기 위해 중군장 안승우에게 지원병을 요청함. 지원병이 오지 않아 공격은 실패함. 1896년 3월 27일 중군장 안승우가 지원병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거칠게 항의함. 이를 문제 삼은 대장 유인석은 군기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선봉장 김백선의 처형을 지시함. 이 처형사건으로 의병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의진이 동요함. 이는 이후 여러 전투에서 호좌의병진이 연달아 패하는 요인이 됨. 평민 출신의 김백선 장군의 처형은 유림이 중심이었던 항일의병부대의 신분차별의식이 그대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었음.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음.
항일의병장 김백선 장군 어록비
동학을 치고 벼슬을 얻은 것이 내게 영화가 되느냐. 영화로 알거든 하여보라. 비록 네가 조양한 포군이기는 하나 내가 온 힘을 다해 모았으니 네 군사는 아니요. 당당한 충.의.예의 무리라. 어찌 네게 맡겨 도적을 돕게 하겠냐! 〈의병사 시말〉
이런 큰 변을 당하여 나라의 신민이 된 자는 대소귀천을 막론하고 마땅히 죽음을 걸고 적을 무찔러 살아서는 옳은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옳은 귀신이 되어야 하겠거늘... 〈육의사열전〉
위 어록은 을마사변이 나도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5일 김백선 장군이 지평 감역 맹영재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꾸짖으며 한 말이다.
- 2019년 12월 5일, 양평군에서 세움 -
항일의병장 김백선 장군 묘비문
(1849.3.13~1896.3.27)
항일 의병장 김백선 장군은 1849년 3월 13일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749번지에서 태어났다. 경주 김씨이며 원래 이름은 '도제', '백선'은 자이다. 1896년 을미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싸웠고, 같은 해 3월 27일 생을 마쳤다. 당시 나이 만 47세. 부인 파평 윤씨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민첩해 부모님은 장군을 용문사에 맡겨 자라게 했다. 윤씨와 결혼한 뒤 강원도 홍천 처가에 머물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양평군 일대 산포수의 지도자가 되어 경기도와 강원도 등지를 무대로 명포수로 활약했다. 사리에 밝고 의를 좇아 포수들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종견을 받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동학군과 싸워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친일관군과 조선 주둔 일본군에 대항해, 1896년 1월 12일 포수 4백여 명을 모아 이춘영과 함께 원주 안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포수부대를 이끌고 제천으로 가 1월 22일 단양 장회협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나서 크게 이겼다. 2월 3일에는 제천의병과 연합해 호좌의병진의 선봉장이 되었고, 2월 16일 충주성을 함락한 뒤 17일 간 머물렀다. 3월 19일에는 충주 가흥에서 일본군을 급습해 궤멸시키곤 재차 가흥창의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중군장 안승우에게 지원병을 요청했다. 중군장 안승우가 지원을 거절하자 이에 분노한 장군은 거칠게 항의했다. 이를 문제 삼은 대장 유인석은 1896년 3월 27일 군기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으로 김백선 장군의 처형을 지시했다. 이는 유림이 중심이던 항일의병부대의 신분차별의식이 그대로 드러난 대표적인 처형사건이었다. 유학자 송상도 선생은 〈기려수필〉에서 '백선처럼 호걸스럽고 용맹한 사람이라...평민에게 욕본 것을 분하게 여겨서인가...안승우가 군사를 보내지 않아 백선이 패하고 의병들의 사기가 꺾이게 되었으니 그의 분노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대의를 내세워 원수를 갚으려 하는 자가 적은 토벌하지 않고 먼저 장수를 죽여서...'라곤, '나라 사람이 모두 억울하게 여긴다'며 한탄했다.
항일의병사 최초의 평민 출신 의병장 김백선의 처형은 호좌의병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전력의 약화를 초래해 이후 전투에서 연달아 패하는 비운으로 이어졌다. 을미의병의 중심부대는 호좌의병진이었으며, 핵심전투력은 장군의 지평의병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공을 인정해 168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나라를 꽃처럼 사랑하다 꽃이 되어 잠든 능소화. 을미의병 선봉장 김백선 여기 묻히다.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산125 김백선 의병장 묘를 찾아가고 있다.

양동 을미의병 묘역에는 김백선 의병장의 묘와 천비마의 묘가 이전할 것을 예정하고 준비되어 있었지만, 아직 이전하지 않고 있다.
의병장 김백선 묘
의병장 김백선(1849~1896)은 양평군 청운면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 본명은 도제이다. 기개와 용력이 비상하고 포수로서의 능력이 탁월해 1890년부터 지평지역(현 양평) 포군을 지휘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져 항일의 기운이 고조되자, 포수 400여명을 이끌고 이춘영, 안승우와 함께 1896년 1월 12일 구한말 최초의 을미의병 지평의병을 거의하였다. 단양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장으로 충주성 전투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가흥전투 중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끝내 패퇴하게 되자, 원군을 보내지 않은 상부에 거센 항의를 하였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내부적 요인으로 뜻하지 않게 산화하셨다. 김백선을 잃은 유인석 의병부대는 그 후 수차례의 전투에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당시 김백선의 시신을 집으로 운구하자 전장의 말이 충북 제천에서 양평까지 찾아와 3일동안 집을 돌아다니다 쓰러져 죽어 장군의 산소옆에 매장하였다고 전해진다. 동학농민군 토벌 공으로 절충장군 첮비를 받았으며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절충장군 을미의병 선봉장
경주김공 도제 자 백선지묘
배 숙부인 파평운씨 합부
동봉 동학 동인
1849년 3월 13일생, 기일 2월 15일
1850년 1월 6일생, 기일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