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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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원덕읍 산양리 844
탐방로그
일제에 항거한 유림들을 탄압하기 위해 헌병대가 불을 질러 없어진 산양서원을 찾았다. 산양서원, 묘정비, 묘정비각 등을 볼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山陽書院(산양서원)
삼척 산양서원 묘정비(三陟 山陽書院 廟庭碑)
삼척 산양서원 묘정비(三陟 山陽書院 廟庭碑)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3호

산양서원 묘정비는 철종 12년(1861)에 산양서원 앞에 세워진 비석이다. 산양서원이 세워진 내력을 밝히고 세종 때 유명한 문인이었던 익성공 황희(翼成公 黃喜)를 추앙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황희는 세종 5년(1423)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자 관아의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삼척부(三陟府)에서는 한 사람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황희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관찰사가 왕래하며 쉬어 가던 와현에 돌을 모아 대를 만들어 소공대(召公臺)라고 하였다. 중종 10년(1515)에 소공대가 오래되어 무너진 자리에 소공대비(召公臺碑)가 세워졌으며 순조 24년(1824)에는 소동사(召東祠)를 짓고 황희의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철종 8년(1857)에는 소동사를 산양서원으로 발전시켜 후학 교육을 시작하였다. 산양서원 건물은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이 내려질때도 남아있었으나. 1913년 일제 헌병대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묘정비와 비각(碑閣)만 남아있다.
山陽書院(산양서원)
山陽書院沿革(산양서원연혁)

1824년 소동사창건
1857년 산양서원으로 陞院(승원)
1861년 서원묘정비 건립
1913년 일제만행으로 서원방화소실
1971년 서원묘정비각복원
1998년 묘정비 지방문화재 123호 지정
2003년 서원 동재 서재 복원
2006년 서원처무실 측간 복원
2008년 서원수직사 삼문 복원
서기 2008년 9월 20일 건수
山陽書院廟庭碑閣(산양서원묘정비각)
山陽書院廟庭碑閣(산양서원묘정비각)
山陽書院廟庭碑閣(산양서원묘정비각)
世民仰德(세민앙덕)
望燎位(망료위) : 제례행사 완료후 관련 물건을 태우는 곳이라고 한다.
靜賢齋(정현재)
삼척시 원덕읍 산양리 844 임원리 측량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방화된 산양서원 묘정비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삼척산양서원묘정비
→ 50m
일제강점기 삼척 원덕에서 일어난 '임원리 임야측량사건'을 재 조명한 '삼척 임원리 항일운동사'가 발간되었고, 광복절 기념행사를 15일 원덕읍 임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하고 있다.
山陽書院(산양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