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514-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강기동 권화경 김석하 김인재 김춘수 맹철호 박종근 신원영 여용서 이관구
고아장 김거복 김성관 김재관 김치삼 문의영 박종수 신지수 오장문 이관영
고유훈 김응달 김성선 김정순 김태성 민긍호 임춘식 신창현 우상옥 이병채
고정복 김경선 김성완 김진근 김현규 민기희 박치복 신태형 유상덕 이근원
구만서 김규명 김성화 김진기 김홍열 민동식 방관일 안기영 윤교승 이근풍
구연영 김규식 김수돌 김진덕 김 훈 민의식 백수기 안석현 윤상룡 이기준
권득수 김길동 김수만 김태묵 남공필 박광천 변도석 안승설 윤성칠 이능서
권낙종 김돌이 김수민 김진문 나상헌 박군선 서석화 안승우 윤성호 이두순
권선경 김동찬 김영록 김진순 나응완 박만빈 서순필 안재항 윤응선 이만응
권승묵 김만수 김용준 김진승 유 각 박윤필 손덕화 안종선 윤종영 이만수
권응정 김백선 김윤구 김진영 유봉석 박정원 손성태 안종엽 윤준영 이문호
권종선 김봉기 김응서 김진현 유중악 박정화 손용문 안종응 윤태훈 이민오
권중식 김상기 김인범 김창식 맹군집 박제삼 신우균 안흥관 이강년 이범구
고아장 김거복 김성관 김재관 김치삼 문의영 박종수 신지수 오장문 이관영
고유훈 김응달 김성선 김정순 김태성 민긍호 임춘식 신창현 우상옥 이병채
고정복 김경선 김성완 김진근 김현규 민기희 박치복 신태형 유상덕 이근원
구만서 김규명 김성화 김진기 김홍열 민동식 방관일 안기영 윤교승 이근풍
구연영 김규식 김수돌 김진덕 김 훈 민의식 백수기 안석현 윤상룡 이기준
권득수 김길동 김수만 김태묵 남공필 박광천 변도석 안승설 윤성칠 이능서
권낙종 김돌이 김수민 김진문 나상헌 박군선 서석화 안승우 윤성호 이두순
권선경 김동찬 김영록 김진순 나응완 박만빈 서순필 안재항 윤응선 이만응
권승묵 김만수 김용준 김진승 유 각 박윤필 손덕화 안종선 윤종영 이만수
권응정 김백선 김윤구 김진영 유봉석 박정원 손성태 안종엽 윤준영 이문호
권종선 김봉기 김응서 김진현 유중악 박정화 손용문 안종응 윤태훈 이민오
권중식 김상기 김인범 김창식 맹군집 박제삼 신우균 안흥관 이강년 이범구
이범기 이성원 이영수 이수봉 정영운 최대현 한창○
이병민 이성재 이창준 전명택 정영진 최명우 허 위
이병수 이소응 이천보 전봉기 정원집 최영우 호근영
이병직 이수건 이춘명 전성환 정철하 최우석 홍기영
이복경 이승룡 이춘영 전운룡 조도환 최유복 홍사구
이복연 이정연 이태영 전창식 조응삼 최태헌 홍여선
이복영 이용채 이풍림 전화춘 조인환 최평심
이봉래 이운성 이필희 정낙인 조정호 한갑복
이봉하 이은찬 이항재 정대일 차치서 한상렬
이붕구 이인영 임옥여 정동섭 차흥준 한성관
이석영 이재복 임을선 정봉준 천낙귀 한원태
이석하 이종덕 임응서 정시항 천후근 한인수
이성서 이준식 장계환 정영보 최대평 한진기
이병민 이성재 이창준 전명택 정영진 최명우 허 위
이병수 이소응 이천보 전봉기 정원집 최영우 호근영
이병직 이수건 이춘명 전성환 정철하 최우석 홍기영
이복경 이승룡 이춘영 전운룡 조도환 최유복 홍사구
이복연 이정연 이태영 전창식 조응삼 최태헌 홍여선
이복영 이용채 이풍림 전화춘 조인환 최평심
이봉래 이운성 이필희 정낙인 조정호 한갑복
이봉하 이은찬 이항재 정대일 차치서 한상렬
이붕구 이인영 임옥여 정동섭 차흥준 한성관
이석영 이재복 임을선 정봉준 천낙귀 한원태
이석하 이종덕 임응서 정시항 천후근 한인수
이성서 이준식 장계환 정영보 최대평 한진기
陽平義兵紀念碑(양평의병기념비)
陽平義兵紀念碑(양평의병기념비)
양평은 대한민국 국토의 중심지로 산자수명하며 도학과 의리를 수상하는 기품이 있는 의향이요 한국 근대 항일민족운동의 발원지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내정 간섭하더니, 마침내 1895년 을미사변이란 국제적 만행을 저지르고 단발령을 시행하는 등 병탄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국수보복의 기치 아래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으니 이것이 을미의병·전기의병이다. 1904년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의 체결, 1905년 을사늑약 등으로 을사의병·중기의병이 일어났고,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등으로 1907년 국권회복을 목표로 정미의병·후기의병이 일어났다. 전기의병의 주도적 역할은 화서학파가 근간을 이루고 그 창의호국 이념은 양근 벽계의 화서 이항로 선생이 주창한 위정척사였다. 전기의병 중 전국에서 가장 유력했던 의병진은 류인석 대장이 이끈 호좌의진이다. 이는 이춘영·안승우·김백선 의병장 등이 포군 4백여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의한 지평의병이 주축이 되었다. 지평의진은 원주·제천 등을 점령하고 단양 장회협에서 승리, 충주성 점령. 수안보·가흥 등지에서 항전하였다. 전기의병으로 일제는 우리나라 침략을 일시 멈추기에 이르렀으며, 호좌의진은 재기를 위해 만주로 가다 파저강변에서 무장 해제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 인적 기반과 정신적 이념은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지평은 전기의병의 발상지로 근대 한국독립운동 50년 역사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크다. 양근의 이승룡 의병장은 의병 3백 여명을 모집하여 서울 진격을 위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양근의 후기 의병장 권득수 최대현·김춘수·이연년·최대평.조인환 등은 용문산을 근거지로 양근·지평관아 등 관공서와 일본인 가옥 등을 습격하는 등 유격전으로 전공을 세웠다. 전국의병은 연합의진 결성을 위해 이인영 대장 휘하에 양동으로 5천여 명이 집결하였으며, 이를 해산시키려는 일본과 삼산리 등에서 격전을 벌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이 결과로 다음 해 13도창의군 일만여 명이 양주에서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말 전후기의병의 요람인 양근과 지평이 통합되어 양평군이 되었으니, 양평의병으로 정립함이 마땅하다. 혼란한 세태에서 문헌이 잔결되어 양평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2천여 분을 모두 찾아 기록하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다. 광복 칠십주년 및 을미의병 창의 백이십주년에 즈음하여 양평의병의 대강을 요약하고 밝혀낸 의병 이백여 분의 성명을 돌에 새겨 세우고 추모하며 숭고한 창의호국정신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한다.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을미 11월 28일
양평의병기념사업회 회장 신교중 근찬, 한산후인 지봉 이정복 제서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을미 11월 28일
양평의병기념사업회 회장 신교중 근찬, 한산후인 지봉 이정복 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