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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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사 순흥 안공 지묘(下沙 順興 安公 之墓)
순흥안공 휘 승우 자 계현 호 하사 문성공 휘 유후 현조 휘 원 개성유수
··· 중략 ···
동래후인 정익수 근식
손 덕희 봉희 철희, 증손 재규 재필 재돈 재흥
계유 3월 10일 근립
의병장 순흥안공 휘 승우 지묘
(義兵將 順興安公 諱 承禹 之墓)
장군의 휘는 승우 자는 계현 호는 하사이니 성은 안씨요 본관은 순흥이시다. 시조는 휘 자미이시고 4세손은 동방유종이신 문성공 휘 향이시다. 이후로 10세손 휘 경은 가선대부 한성부윤 증 숭정대부 판의금부사 오위부총부 도총관인데 장군의 파조이시다. 증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휘 광욱은 공의 9대조이시다. 고조는 휘 근 증조는 휘 경묵 조고는 휘 상옥이시고 고는 을미의병을 계획하고 후원하며 선도적 역할을 하신 애국지사 퇴앙 휘 종응이시다. 비는 덕수인 이공 준신의 따님이시니 숙덕을 갖추셨다. 장군은 1865년 7월 9일 출생하여 어린시절에는 퇴앙 선생과 이용강 선생에게서 공부를 하셨다. 관례 이후 화서 문인 성재 유중교 금계 이근원 의암 유인석 3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에 심취
되고 그 실천을 위하여 학문에 정진하셨다. 그런데 시국은 일본과 친일파들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고 국권을 농락하더니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려 민족 고유의 풍습과 정기를 말살하면서 침략의 의도를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의 존망이 경각에 달린 참담한 지경에 이르매, 장군은 분개하며 이리와 같은 일본 앞에 짐승처럼 사는 것보다 차라리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람답게 죽겠다면서 의병투쟁에 나섰다. 장군은 아버지 퇴앙 선생의 계획과 주도하에 이공 춘영 김공 백선 등과 함께 을미년의 거족적 항일의병투쟁의 대표적인 지평의병을 일으키셨다. 장군은 군무부 유사 전군장 중군장의 군무를 맡아 장졸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자신의 신병을 돌보지 않고 의리로써 충성을 다하니 모든 의병이 존경하여 따랐다. 장군은 왜적과 누전누첩하며 적을 소탕하고 친일 관청을 점령하여 친일 수령을 목베는 등 응징하며 전과를 올리셨다. 그러나 서기 1896년 병신 4월 13일 제천 남산전투에서 적의 탄환에 다리를 맞고 붙잡혀 적의 야만적인 난장에도 굴복하지 않고 왜적을 향해 크게 호령하다 순절하시니, 향년 32세이시다. 그러므로 모두들 경탄하며 슬퍼하고 울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박공 정수 이공 용규 등이 갈마곡에서 장군의 시신을 찾아 거두어 제천시 화산 서좌에 임시 장사 지냈는데, 서기 1980년 무신 5월에 손자 덕희가 양동면 석곡리 사이 실 자좌에 천묘하였다. 아! 슬프다. 장군은 6의사 열전에 기록되고 소의신편에 화서문하 연원사절 10현에 들었으며, 서기 1962년 임인 3월 1일에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배위 덕수이씨는 문정공 택당 선생의 후손 민영의 따님이시다. 서기 1862년 임무 6월 30일에 출생하여 1948년 8월 무자 12월 24일에 졸하셨다. 생 2남 하시니
장남 기영은 항일의병 활동으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차남 회영은 출계하였다. 손자에 덕희 봉희 길희가 있다. 증손 재규는 덕희 소생인데 인천시 부이사관을 역임했고 재필 재돈은 봉희 소생이며 재흥은 길희 소생이다. 이하는 생략한다. 서기 2007년 정해 계춘 양동면 석곡리 산 70번지에 조성한 양평군 의병묘역 간좌에 합폄으로 천장하였다. 석물을 새로 갖춤에 동래 정공 익수가 지은 묘갈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새로 기록할 사항이 더 있으므로 부득이 이 비문을 새로 지어 전 묘갈과 같이 세운다.
단기 4340년 정해 5월 일 족질 안상복 근찬
양평군.양평군.양평의병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