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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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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105 이춘영 의병장의 묘를 찾았다. 이춘영 의병장의 묘 역시 양동 을미의병 묘역에 이전될 것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지만, 이장이 안되고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증손 재군 재석
현손 영수(창용) 상용 성재(승용)
현손 영수(창용) 상용 성재(승용)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105 이춘영 의병장의 묘를 찾았다.
의병장 이춘영의 묘
향토유적 제18호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97-2
이춘영은 조선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우삼, 호는 괴은 본관은 덕수, 지평 출신이다.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동향인 퇴앙 안종응에게 계책을 묻고 김백선을 만나 지평포군 400여명을 포섭, 원주 안창에서 지평의진을 창의하여 단양 장회협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지평포군들이 분열되자 죽령을 넘어 풍기관아에 군수물을 맡기고 순흥에 유진중 정식으로 대장이 되었다. 김백선과 함께 충주성 함락에 전공을 세운 후 달천에서 일본군을 물리쳐 승승장구하였으나 수안보 싸움에서 28세 나이로 전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묘 앞에는 상석, 우측에 묘비가 있는데 묘비 앞면에는 한글로 「우삼 이춘영 묘」라 음각되어 있다. 비는 1970년에 건립된 것으로 재료는 대리석이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17㎝, 폭 41㎝, 두께는 17㎝이다.
향토유적 제18호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97-2
이춘영은 조선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우삼, 호는 괴은 본관은 덕수, 지평 출신이다.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동향인 퇴앙 안종응에게 계책을 묻고 김백선을 만나 지평포군 400여명을 포섭, 원주 안창에서 지평의진을 창의하여 단양 장회협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지평포군들이 분열되자 죽령을 넘어 풍기관아에 군수물을 맡기고 순흥에 유진중 정식으로 대장이 되었다. 김백선과 함께 충주성 함락에 전공을 세운 후 달천에서 일본군을 물리쳐 승승장구하였으나 수안보 싸움에서 28세 나이로 전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묘 앞에는 상석, 우측에 묘비가 있는데 묘비 앞면에는 한글로 「우삼 이춘영 묘」라 음각되어 있다. 비는 1970년에 건립된 것으로 재료는 대리석이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17㎝, 폭 41㎝, 두께는 17㎝이다.
안내판의 설명과는 다르게 되어있다.
순국선열 이춘영의 묘
순국선열 이춘영의 묘
선생은 경기 양평(지평)인으로 1895년 을지사변이 일어나고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노략하자 비분강개하여 안승우와 함께 거의하였고 김백선을 설득 김백선이 영솔하던 관군 400여 명으로 의병대를 조직하여 원주를 점령하고 제천, 단양, 청풍, 군수와 충주 관찰사를 생포하게 되자 일병 수백명이 공격하여 오므로 단양에서 대파하고 의성을 크게 떨쳤으나 1896년 영남과 호남의 요충인 조령 수안보에서 일병과 다시 싸우다가 적탄을 맞고 향년 28세로 아깝게 순국하시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 수여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 수여
義兵將 德水李公 春永 先生 之墓 配 孺人 延安金氏 祔左
(의병장 덕수이공 춘영 선생 지묘 배 유인 연안김씨 부좌)
(의병장 덕수이공 춘영 선생 지묘 배 유인 연안김씨 부좌)
공의 휘는 춘영 자는 우삼 호는 괴은이요 관은 덕수요 시조는 고려중랑장군 휘 돈수부군이시다. 고려조에서 6대를 현달하시고 17대조 휘 양 호 춘당께서 시조선조 공조참의요 13대조 휘 행 좌의정 겸 대제학 시 문헌 호 객재요 9대조 휘 식 이조판서 겸 대제학 시 문정 호 택당이요 6대조 휘 기진 이조판서 시 문헌 호 목곡이요 조 휘 재신께서는 명문의 후예로 관에 불취하시고 아버지 휘 민화는 동부도사요 어머니는 경주최씨이며 4201년 무진에 지평향리에 출생하시였다. 소시부터 총명 지혜하며 학문에 독실하여 도량과 기개가 뛰어나 불의와 타협할줄 모르는 천품이라 주위 사람들이 장차 크게 될 사람이라는 말을 하였다. 4209년 국운이 비색하여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니 향리에서 편
모를 극진히 모시였다. 명문의 후예이라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으나 불의를 멀리하고 지조를 지키다 교우 안승우와 뜻을 같이하여 구국 준비운동에 착수하여 4227년 갑오경장과 이듬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더 참을 수 없어 4228년 지평 양동 원주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동년 11월 28일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에서 전국에서 가장 먼저 구국 창의에 기발을 올리고 의병장이 되여 원주를 거처 제천에 이르러 이필희와 함께 선사 유인석을 받들어 대장으로 추대하고 공은 중군장이 되여 충주에 도착하여 일군을 격파하고 성을 점령하였다. 당시 충주관찰사 김규식이 가흥에 있는 일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음으로 의병은 28차의 격전을 하고 4228년 1월 3일에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현감 서상기를 효수하고 1월 5일에 관찰사 김규식을 참수하여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고 패주하는 잔당을 추격하다 종사 홍선표와 의논하든 중 일군의 유탄에 관통되여 장렬하게 일생을 마치시니 공의 나이 29세였다. 공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유대장 이하 모든 장졸들이 애통해하고 원근 상하 승속 남녀 불문하고 할 일을 놓고 슬퍼하니 관일 합동군까지도 비통하였으니 웅대한 기상과 정의는 뒤를 있는 의병사기의 귀감이 되었다. 공의 유해는 장질 종한이 치상하여 선영하에 모시는데 지나는 곳마다 애도의 전송인파가 인산을 이루었다. 묘는 양동면 석곡리 산 97의 1번지에 안장되였으며 4296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개국 4326 계유 12월 6일 근수
개국 4326 계유 12월 6일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