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95
- 탐방로그
- 박열 의사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여사는 1922년 도쿄에서 박열 의사와 만나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다 박열 의사와 함께 일왕 암살모의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1926년 옥중에서 숨진 후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에 안장됐다가 2003년 박열 의사 기념공원 이곳으로 이장됐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금자문자 묘비 건립준비위원회
대표위원 정화암, 위원 고성희 양일동 이동순 하기락 김신원 안형근 이홍근 하종진 김금순 육홍균 장홍염 하춘영 김재현 우한기 정찬진 한현상 박기성 이정규 정래동 한길 박승한 이지활 최갑룡 홍성환 양희석 이강훈 최중헌 요원일남 이초 최학주
대표위원 정화암, 위원 고성희 양일동 이동순 하기락 김신원 안형근 이홍근 하종진 김금순 육홍균 장홍염 하춘영 김재현 우한기 정찬진 한현상 박기성 이정규 정래동 한길 박승한 이지활 최갑룡 홍성환 양희석 이강훈 최중헌 요원일남 이초 최학주
박열 의사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묘.
여사는 1922년 도쿄에서 박열 의사와 만나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다 박열 의사와 함께 일왕 암살모의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1926년 옥중에서 숨진 가네코 후미코 여사는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에 안장됐다가 2003년 박열 의사 기념공원 이곳으로 이장됐다.
여사는 1922년 도쿄에서 박열 의사와 만나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다 박열 의사와 함께 일왕 암살모의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1926년 옥중에서 숨진 가네코 후미코 여사는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에 안장됐다가 2003년 박열 의사 기념공원 이곳으로 이장됐다.
원하는 대로 사형이 선고됐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부디 우리를 단두대에 세워달라. 나는 박열과 함께 죽을 것"이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일왕의 은사장을 찢어버렸다.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일왕의 은사장을 찢어버렸다.
거칠것 없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결혼(1924년)을 하고, 1926년 2월 26일의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는다.
감옥안에서 청년 박열은 3월 법원에 혼인계를 제출해 법적으로도 부부가 된다.
이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고 박열은 지바형무소로 이감되고 100여일 후 가네코 후미코는 23살의 젊은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감옥안에서 청년 박열은 3월 법원에 혼인계를 제출해 법적으로도 부부가 된다.
이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고 박열은 지바형무소로 이감되고 100여일 후 가네코 후미코는 23살의 젊은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박의사의 형 박정식에 의해 인수된 그녀의 시신은 한국 박의사의 고향에 안장되었지만,
아쉽게도 의사의 주검은 지금 북한 애국선열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金子文子 女史 之墓(금자문자 여사 지묘)
아쉽게도 의사의 주검은 지금 북한 애국선열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金子文子 女史 之墓(금자문자 여사 지묘)
소백산 조령기슭 여기 이곳에 여류 아나키스트 금자문자(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고히 잠들어있다. 여사는 1904년 1월 25일 일본 야마나시현에 본적을 두고 횡빈시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 환경속에 자라난 여사는 한때 고모 유인으로 한국땅 부강에서 방랑하였다. 섬세한 감수성과 명철한 두뇌의 여사는 당시 일본제국의 포학한 왜략하에서 도탄에 빠져있는 한국인의 처참한 모습을 남달리 민감하였다. 고모의 학대에 못이겨 일본으로 되돌아가때는 벌써 여사의 가슴 속 깊이 자기의 모국 일본의 부정불의에 대한 의분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여사가 일본제국주의에 항거 항쟁하든 혁명투사 박열 선생과 생사를 같이할 동지일뿐만 아니라 부부로 결합하였다는 필연의 결과다. 흑도회 흑우회의 맹원으로 활약하든 박열 선생은 여사와 같이 일본제국주의 상징인 천황을 모살할 계획을 세워 비밀리에 공작을 펴어오든 중 1922년 4월에 김중한 신산초대 육홍균 장상중 한현광 서동성 서성경 정태술 하세명 홍진유 최규종 율원일남 소천무 야구품이들 제씨와 더불어 혁명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현사회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동경대지진 당시에 불령사 맹원 전원이 검거투옥되었다. 이렇게 검거되어 예심을 받던 과정에서 육홍균씨 외 13명은 석방되고 박열 선생과 여사는 4년이라는 기 세월에 17회의 예심을 거쳐 1926년 2월 26일에 제1회 재판개정을 보게 되었으나 그들의 사상은 추호의 동요없이 천황유해론 약소민족해방 한국독립의 정당성 인간의 자유를 시종여일하게 주장하셨다. 급기야 그들은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자 여사는 만세를 외치고 박열 선생은 재판장에게 수고했군 하며 조소를 지었다. 이 사상의 일관성 이 태도의 침착성 이 생사의 초월성은 만세 되어서 사상가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동년 7월 23일 여사는 수감 중이던 회목(도치기)형무소에서 의문의 횡사로 그 한 많은 일생을 마쳤으니 향년 23세다. 동년 동월에 여사의 유해는 그 무서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많은 동지와 시숙 박정식 씨들의 정성으로 ○국에 반장되었으나 일제의 날카로운 감시로 성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50성상을 거치는 동안 풍마우세로 그 근적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
겨 동지들은 모든 성의를 모아 유지들의 찬조를 얻어 봉분을 개축하고 묘비를 세워 그 투혼을 영원히 기념하기로 한다.
1973년 7월 23일
금자문자 묘비 건립준비위원회 수
1973년 7월 23일
금자문자 묘비 건립준비위원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