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의사로 79, 외 (대교리)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홍주의사총
홍주의사총(洪州義士塚)
지정별 : 사적 제431호
지정년월일 : 2001년 8월 17일
위치 :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124-2
이곳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1905년에 을사박탈조약이 체결되자 전 이조참판 민종식이 중심이 된 의병이 홍주성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국하신 수백명의 유해가 합장되어 있는 묘소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6년 3월 의병을 모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남포와 보령 지역을 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고 충청서부지역의 전략적 거점인 홍주성을 5월 19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의병들은 막강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연속적인 공격을 격렬히 막아 내었으나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5월 30일 홍주성은 함락되고 수백명의 의병들이 순절하였다.
의병의 유해는 일제강점기동안 홍성천변과 남산부근에 방치되어 수습하지 못하였던 것을 1949년 4월 현재의 홍주의사총 부근에서 나무를 심다가 많은 유골을 발견하여 병오년 항일의병전에서 전사한 의병군의 시신임을 확인하고 군민들이 정성을 모아 지금의 자리에 합장하게 되었으며, 매년 5월 30일에 순국 의사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지정별 : 사적 제431호
지정년월일 : 2001년 8월 17일
위치 :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124-2
이곳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1905년에 을사박탈조약이 체결되자 전 이조참판 민종식이 중심이 된 의병이 홍주성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국하신 수백명의 유해가 합장되어 있는 묘소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6년 3월 의병을 모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남포와 보령 지역을 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고 충청서부지역의 전략적 거점인 홍주성을 5월 19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의병들은 막강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연속적인 공격을 격렬히 막아 내었으나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5월 30일 홍주성은 함락되고 수백명의 의병들이 순절하였다.
의병의 유해는 일제강점기동안 홍성천변과 남산부근에 방치되어 수습하지 못하였던 것을 1949년 4월 현재의 홍주의사총 부근에서 나무를 심다가 많은 유골을 발견하여 병오년 항일의병전에서 전사한 의병군의 시신임을 확인하고 군민들이 정성을 모아 지금의 자리에 합장하게 되었으며, 매년 5월 30일에 순국 의사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홍주성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국한 의병 수백 병의 유해가 묻혔다고 하는데, 1949년 4월 5일 홍성 군수 박주철과 경찰서장 박헌교가 부하직원들과 함께 나무를 심다가 의외로 많은 유골을 발견했는데, 홍주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의병들의 유골이 임시 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어 유골을 모아서 분묘를 조성하였다 한다.
홍주의사총 성역사업조성기
악날한 일본군이 배일노선을 고수하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단발령의 강행과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민심이 날로 흉흉해지자 이에 분개한 홍주고을 충의열사들이 분연히 창의봉기하였으니 이는 조선조말 주권회복을 선도한 항일의병의 시초였다.
구국일념에서 죽기를 맹세하고 적수공권으로 항전하였으나 1906년 병오 음 4월 9일 여명에 중과부적으로 순의하였으니 산천도 경탄통곡할 참사였다. 900여 의사공들의 시신은 구국의 원한도 풀지 못한 채 산격 위에 ○○만 오가는 음곡에서 40여년간 풍상설한에 폭로되었으니 진실로 가슴을 외이는 통한이었다. 민족이 있어도 강토가 없었던 왜정때에는 산화한 선열들의 유골을 수묘할 겨를조차 없었다가 8.15광복을 맞아 산재한 황예를 수심하여 심감합장의 혜를 갖춘 후, 사당에 위패를 봉안하고 구백의사총이라 하였다.
1991년 12월 총 37억원의 재원을 마련 만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묘역 정비, 사당 보수, 석물 조성, 삼문 신축과 부속 공사까지 완성하여 말끔히 단장하고 이 성역을 홍주의사총이라 개칭하였다.
이 역사적인 사업은 살신으로 호국한 영령들의 넋을 영원히 애도하고 그 순국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만세토록 호국할 수 있는 충절의 지표가 될 것이다.
1992년 12월 30일 홍성군수 이상선 근식
악날한 일본군이 배일노선을 고수하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단발령의 강행과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민심이 날로 흉흉해지자 이에 분개한 홍주고을 충의열사들이 분연히 창의봉기하였으니 이는 조선조말 주권회복을 선도한 항일의병의 시초였다.
구국일념에서 죽기를 맹세하고 적수공권으로 항전하였으나 1906년 병오 음 4월 9일 여명에 중과부적으로 순의하였으니 산천도 경탄통곡할 참사였다. 900여 의사공들의 시신은 구국의 원한도 풀지 못한 채 산격 위에 ○○만 오가는 음곡에서 40여년간 풍상설한에 폭로되었으니 진실로 가슴을 외이는 통한이었다. 민족이 있어도 강토가 없었던 왜정때에는 산화한 선열들의 유골을 수묘할 겨를조차 없었다가 8.15광복을 맞아 산재한 황예를 수심하여 심감합장의 혜를 갖춘 후, 사당에 위패를 봉안하고 구백의사총이라 하였다.
1991년 12월 총 37억원의 재원을 마련 만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묘역 정비, 사당 보수, 석물 조성, 삼문 신축과 부속 공사까지 완성하여 말끔히 단장하고 이 성역을 홍주의사총이라 개칭하였다.
이 역사적인 사업은 살신으로 호국한 영령들의 넋을 영원히 애도하고 그 순국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만세토록 호국할 수 있는 충절의 지표가 될 것이다.
1992년 12월 30일 홍성군수 이상선 근식
倡義門(창의문)
충남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124-2 홍주의사총.
이 홍주의사총은 조선말기(병오년) 홍성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 운동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처음에는 구백의사총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홍주의사총은 조선말기(병오년) 홍성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 운동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처음에는 구백의사총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