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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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305
탐방로그
충청북도 청주시에 위치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를 찾아왔다. 본래 묘소 위치는 단재영각 뒷문 너머였는데, 이 자리에서 물이 많이 나와 유족이 묘소를 바로 뒷쪽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선생의 묘소 근처에는 조부와의 이야기가 깃든 모과나무와 선생의 사적비가 함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늘이 사람을 나리사 무디어진 겨레의 넋을 일깨우고 흐리어진 민족의 정신을 깨치어 민족의식을 제자리잡게 하기위하여 비바람 한평생을 지사로 사가로 석학문호로서 역사를 움직이게 한이 있으니 이는 단재 신채호선생이시다.
일직 1880년 고종 17년 경진 11월 17일 대덕군 정생면 도림마을에서 나시고 청주 낭성면 고디미에서 자라시니 본관은 고령 부친은 휘 광식 모친은 밀양박씨로 그 두째아드님이요 어려서부터 슬기 뛰어나시었다. 조부 신성우선생에게 한학닦으시다가 열아홉에 상경, 단서 신기선ㅅ공의 천으로 성균관에 드시고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되시며 때에 을미의 협약으로 장지연선생 '시일야방성대곡'의 언봉들어 투옥되시자 선생이 뒤를 이어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혹은 1906년으로 경술국치까지 왕조말 민족주의 마지막 방패이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되시어 배일사상과 독립사상을 높이는 한편 1907년에는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고 혹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는등 기우러져가는 조국을 바로잡고져 젊은가슴을 애태우시었다.
1910년 경술 나라안에서는 장지를 펼 수 없으매 그해 가을 동지 안창호, 이갑, 이종호선생과 중국 처도를 거쳐 노령해참성에 망명 해조신문을 내어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지 규합에 힘쓰면 1914년 봉천성 회인현에 머물러서는 한국사 약술에 착수하여 백두산을 답사하며 남북만주를 고루 밟아 고구려의 고적과 광개토대왕을 찾고 1915년에는 북경에서 한국사의 사료를 ??한편 신규식선생으로 더불어 신한청년회를 조직하고 박은식, 문일평선생과 박달학원을 세워 해외의 우리 젊은이를
이끌고 한중 항일공동전선을 펴시었다. 나라 앗긴지 10년 을미년 3월 온 민족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펴고 수삼의 임시정부를 상해임정으로 통합함에 선생 이에 참여하여 평정관 의정원의원 임정전원위원회 위원장등에 뽑히고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단장에 추대되시었다. 그후 제2회 보합단에 들어 내임장으로서 군자금 모으리와 혹은 김정묵, 박봉래님으 더불어 통일책진회를 조직하여 그 취지를 펴고 혹은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여 나라 건지는 지금길을 밝히더니 상해임정 국민대표자회의를 시점으로 임정독립지사는 이른바 개조와 창조의 양파로 갈리고 선생이 문득 창조파의 앞에 서게되자 부득이 상해에서 몸을 북경으로 옮기고 다물단을 조직하였다.
1922년이후 북경 관음사 외로운 역경속에서도 한국사 연구에 전력하여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등 때를 전후하여 역작에 몰두하며 이어 전후삼한고를 탈고하신뒤 1928년 일약 무정부주의 비밀결사사건에 관련 대련에서 왜경에게 잡히어 10년형을 받고 여순옥 8년의 모진 옥고속에 1936년 2월 18일 급한 질환일어 그달 31일 이억땅 옥창에서 한뱆힌 일생을 마치고 순절하시니 향년이 쉬흔일곱이시었다.
선생 중태의 급한 기별에 서울에서는 신석우선생의 지시에따라 친우 서세충님의 인도로 부인 박자혜여사와 맏아들 수범은 여순에 이르고 2월 22일 다비 부인이 유해를 받들어 24일밤 서울역에 도착, 수범, 두범 어린 두아들 뒤따르고 원세훈, 박돈서선생 호상하여 낭성 관정리 신백우선생 댁에서 하룻밤을 봉안 25일 고디미마을 선생의 옛집터에 고이 모시고 한만해, 오위창, 신경부선생의 뜻과 그 손은로 묘갈이 세워졌다. 회고하건대 선생 개척의 단제사학은 민족주위 사과네 서는 독립정신의 확립에 있었으니 일제가 위증 조작한 한국사를 실증을 들어 전면 거부하고 한편 역사적으로 우리 자신속에 고질화된 중국중심의 부용적 정신을 배제하며 또한 고대로만 복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에의 의욕을 위하여 헌신적 실천을 하신것이니 선생의 본뜻은 자주적독립정신을 되찾아 그 정신의 발휘로 자주를 확립하고 그렇게하기위하여 국사를 바르게 연구하며 한국사상을 겨레에게 가르치고 심어서 민족자강을 이루리라는 바 일천년래 시들었던 배달정신을 불러이르키어 민족의 영혼을 창달하려는데 있으시었다. 거룩하신 선생의 유방이여 임은 가식되 이름은 나라 안팎에 우뚝히 살아남으니 개화당년 이곳 고디미 산마을 호롱불밑에서 정신 다듬고 글 배우던 선생 일세의 석학으로서 그 학적권위는 망명 중국땅에 울리고 방명은 온누리에 떨치어
1945년 상행 신채호학교가 설립되어 중국측에서 세계사 대표 이석증 중국학전관대표 양중락...님과 한국측에서 정화암, 유자명님이 서로 협조하여 한국의 학술, 문화를 세계에 소개하는 민족의 영광을 가져오신것이다.
한편 광복전후로 나라안에서도 유고발간의 일은 두세번 거듭되어 혹은 한용운, 박광, 최범술님이 혹은 병영로님이 혹은 향리의 후학들이 전집출간을 꾀하였으나 뜻 이루지 못하더니 1970년 정부 후원아래 단재 신채호 전집편찬위워회를 구성 열매 맺게되며 1971년 외솔회는나라사랑 특집으로 선생을 높이 기리고 이에 앞서 1962년 3월 1일 나라와 겨레앞에 보이신 공적이 뛰어나사 대한민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으시는등 민족의 갈길을 밝히신 선생의 뜻과 사상은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고 있다.
아아 여기는 선생이 자라시고 인간정도와 민족정기를 다듬으신 옛터요 그 정성다하시다 나라빡에서 순국하여 옛터에 묻히사 배달 넋 뿜어내는 거룩한 묘역. 선생이 터어놓으신 바른 국사관은 오늘에 살아서 겨레의 빛이 되고 그힘으로 조곡은 밝았거니 그 높은정신을 길이 천추에 전하고져 문화공보부와 청원군이 유택을 봉분하고 묘역을 고름 즈음하여 삼가 이 비를 세운다.
단재영각 뒤로 묘소로 올라가는 문이 있었다.
단재영각 뒤 묘소 자리에는 묘가 보이질 않았다. 추후 찾은 정보로는 단재 선생의 유족이 묘소 자리에서 물이 많이 나와서 이장했다고 한다.
바로 뒤쪽에 새롭게 이장한 묘소가 보였다.
묘소 뒷편 우에 있는 큰 나무가 모과나무이다. 1888년 신채호 선생이 9살 때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을 해독하자 그의 조부가 이를 기념해 집 뜰에 모과나무를 심었다고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 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