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승 묘

4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 산21-2
탐방로그
애국지사 이주승 선생과 이조승 선생은 형제 관계이시고, 두 분의 묘소는 한 곳에서 탐방이 가능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恭陵參奉 延安李公 徽菴 諱 胄承 之墓
공릉참봉 연안이공 휘암 휘 주승 지묘
恭陵參奉 延安李公 徽菴 諱 胄承 之墓
공릉참봉 연안이공 휘암 휘 주승 지묘
부군의 휘는 주승 자는 대재 호는 휘암 본관은 연안이다. 시조는 당 중랑장으로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유임하여 연안백에 봉해진 휘 무이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조에 삼장 장원한 저헌 문강공 휘 석정은 부군의 15대조이다. 변무주로 이름난 좌의정 월사 문충공 휘 정귀는 11대조이고 이조판서 백주 문정공 휘 명한는 10대조이며 예조판서 증 영의정 청호 문숙공 휘 일상은 9대조로 3세를 연이어 문형이 됨으로서 세상에서 명문이라 칭
부군의 휘는 주승 자는 대재 호는 휘암 본관은 연안이다. 시조는 당 중랑장으로 백제를 평정하고 신라에 유임하여 연안백에 봉해진 휘 무이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조에 삼장 장원한 저헌 문강공 휘 석정은 부군의 15대조이다. 변무주로 이름난 좌의정 월사 문충공 휘 정귀는 11대조이고 이조판서 백주 문정공 휘 명한는 10대조이며 예조판서 증 영의정 청호 문숙공 휘 일상은 9대조로 3세를 연이어 문형이 됨으로서 세상에서 명문이라 칭
하였다. 조는 감역 노강 휘 민익이고 고는 거사 포헌 원재이며 비는 안동김씨로 참봉 언근의 따님이다. 부군은 고종 경오(庚午)(1870)년 2월 21일 출생하니 천용(天容)이 준일(俊逸)하고 천성이 인후(仁厚)하며 재품(才稟)이 영특(英特)하여 일찍부터 독서와 시문에 능하였고 천민(賤民)이나 유걸(流乞)에 대한 긍휼지심(矜恤之心)이 지극하여 면대(面對)하게 되면 빈객(賓客)으로 융우(隆遇)하여 그 덕행을 흠앙(欽仰)하는 송덕비가 전국 도처에 건립되었으며 모부인(母夫人) 상사(喪事) 시에는 東國安女宗徽菴 李參奉 大夫人 喪禮(동국안여종휘암 이참봉 대부인 상례)라는 銘旌(명정)에 전국 유걸(流乞) 대표 이원보 서기 강문봉(康文峯) 근정(謹呈)이라 기록(記錄) 화환(花環) 등과 함께 각도 대표 유걸(流乞)이 함께 조상(弔喪)하였다. 수학(修學)하던 당시의 국내 정세는 왜적의 침략 흉계가 날로 심하고 친일 역당(逆黨)이 왜호(倭好)가 되어 마침내 국권 약탈(掠奪)을 노골화(露骨化)함에 시세(時勢)에 부앙(俯仰)치 않는 학문을 의연(毅然)히 중단하고 의암 유인석 의진에 종사(從事)로 부진(赴陳)하여 사재(私財) 헌납(獻納) 의병 모병 등 군무 전반에 걸처 고심하며 혈성(血誠)을 다하였으며 정미(1907)년 운강 이강년 선생이 재의거함에 다시 종사(從事)로 부찬책(赴贊策)하는 등 장장 15년 여에 걸처 진충갈력(盡忠竭力) 충의(忠義)를 다하였다. 배 연일정씨는 해만의 따님으로 2녀를 두었으니 이은만 홍원표에 출가하였고 계배 고령박씨는 주응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낳으니 남은 구영 칠영이고 녀는 김 시중에 출가하였으며 손자 봉훈 범훈을 두었고 손녀는 이인성 조희구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병술년 5월 28일
하였다. 조는 감역 노강 휘 민익이고 고는 거사 포헌 원재이며 비는 안동김씨로 참봉 언근의 따님이다. 부군은 고종 경오(庚午)(1870)년 2월 21일 출생하니 천용(天容)이 준일(俊逸)하고 천성이 인후(仁厚)하며 재품(才稟)이 영특(英特)하여 일찍부터 독서와 시문에 능하였고 천민(賤民)이나 유걸(流乞)에 대한 긍휼지심(矜恤之心)이 지극하여 면대(面對)하게 되면 빈객(賓客)으로 융우(隆遇)하여 그 덕행을 흠앙(欽仰)하는 송덕비가 전국 도처에 건립되었으며 모부인(母夫人) 상사(喪事) 시에는 東國安女宗徽菴 李參奉 大夫人 喪禮(동국안여종휘암 이참봉 대부인 상례)라는 銘旌(명정)에 전국 유걸(流乞) 대표 이원보 서기 강문봉(康文峯) 근정(謹呈)이라 기록(記錄) 화환(花環) 등과 함께 각도 대표 유걸(流乞)이 함께 조상(弔喪)하였다. 수학(修學)하던 당시의 국내 정세는 왜적의 침략 흉계가 날로 심하고 친일 역당(逆黨)이 왜호(倭好)가 되어 마침내 국권 약탈(掠奪)을 노골화(露骨化)함에 시세(時勢)에 부앙(俯仰)치 않는 학문을 의연(毅然)히 중단하고 의암 유인석 의진에 종사(從事)로 부진(赴陳)하여 사재(私財) 헌납(獻納) 의병 모병 등 군무 전반에 걸처 고심하며 혈성(血誠)을 다하였으며 정미(1907)년 운강 이강년 선생이 재의거함에 다시 종사(從事)로 부찬책(赴贊策)하는 등 장장 15년 여에 걸처 진충갈력(盡忠竭力) 충의(忠義)를 다하였다. 배 연일정씨는 해만의 따님으로 2녀를 두었으니 이은만 홍원표에 출가하였고 계배 고령박씨는 주응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낳으니 남은 구영 칠영이고 녀는 김 시중에 출가하였으며 손자 봉훈 범훈을 두었고 손녀는 이인성 조희구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병술년 5월 28일
졸하니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 산 20번지 옥로봉 간좌원 선고 묘하에 장사하고 두 배위와 합장하였다. 묘비 건립에 즈음하여 밝혀둘 것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사실과 금반 묘비건립행사에 제천시장과 국가보훈처 충주지청장의 지원이 있었음을 밝힌다.
2001년 9월 일 종손 숙훈 경찬
제천시 한수면 탄지리 264에 위치한 애국지사 이주승, 이조승 묘소 안내판를 찾았다.
형제 두 분의 묘소가 제천시 한수면 북노리 뒤산 옥녀봉으로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배를 타고 가야만 당도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정보가 있었다.
애국지사 이조승 이주승 묘소
500m 정도를 걸어가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성지도를 보면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가면서 이런 안내판이 몇 번 나왔다.
시멘트길과 비포장도로가 계속 반복되었다.
이곳부터 충주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GPS 좌표를 남기기 위해 주요지점마다 촬영을 하였다.
네비게이터에서는 이곳에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로 간주하고 계곡 방향을 가리키면서 도착했다고 알려준다.
위성지도로는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야 하고 다음 로드뷰에서는 오른쪽으로만 길 안내가 나온다.
하지만 묘소가 있는 왼쪽으로도 새로운 시멘트 길이 되어있고, 문도 열려 있었다.
더구나 임도의 이름이 북노임도(애국지사 임도) 530m라고 되어있다.
아마도 두 분의 애국지사 묘소 때문에 건설된 임도로 보인다.
한쪽이 낭떠러지이고 좁은 길을 오다 보니 촬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임도의 끝 지점에는 작은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위쪽에도 묘비가 보여서 올라가 보니 다른 분의 묘소이었다.
또 중간에는 묘소가 있었다가 이장한 곳도 있었다.
아마도 충주댐으로 찾기가 힘들어서 이장한 것으로 보인다.
위성지도상으로는 탁 트인 공간에 2기의 묘소인 줄 알았는데, 총 3기의 묘소가 있었다.
延安李公徽菴胄承之墓(연안이공 휘암 주승 지묘)
延安李公徽菴胄承之墓(연안이공 휘암 주승 지묘)
자 구영 칠영, 손 봉훈 범훈
숭조 2-5-40.
아마도 워낙 외진 곳이라서 선조들의 묘소 위치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리번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