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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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고암동 58-6
탐방로그
순국의병장 김상태의 묘는 충북 제천에 있으며, 제천 순국선열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천시 사업으로 순국선열의 묘를 이곳에 이장하여 정화하게 된것이다. 구국의 대의앞에 몸을 던진 그 높은 충절의 정신을 천추에 기리고자 정부에서는 1963년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84년 갑자 1월 일 순국선열묘 이장추진위원회
순국의병장 김상태지묘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1896년 의병이 봉기할 때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이강년과 함께 문경에서 안동관찰부사 김석중을 처단하는 등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뒤 제천 유인석의 진영에 합류하여 싸웠다.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이강년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켜 중군장으로 항전하였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고 순국한 뒤에는 의병대장이 되어 경기도·강원도·경상도일대에서 항전하여, 그 용명이 세인을 탄복하게 하였다.
순국의병장 김상태지묘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어져간 한말에 나라를 지키고자 분연히 일어난 김상태의병장은 자는 백육 호는 백우 본관은 삼척으로 사람됨이 비범특출하고 지조가 굳은 인물이었다. 이강년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와 형제의 의를 맺고 의병 중군장이 되어 어러번 전공을 세웠다. 이때에 유인석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크
게 떨치니 이강년과 더불어 유인석 진영에 합류하여 활동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유인석이 의병을 해산하고 만주로 망명하자 그도 유선생을 따라 만주로 가서 삼년간 종사하다가 귀국하였다.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정미칠조약이 맺어지고 고종이 퇴위하자 의분을 참지못한 그는 다시 이강년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중군장으로 문경 영천 원주 등지를 전전하며 대수 수십차례의 싸움에서 왜군을 격살하여 그의 신출귀몰한 전술은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908년 6월 금수산 까치성 싸움에서 패하여 이강년이 왜군에게 체포된후 그는 부대를 인솔하고 1911년까지 4년간 태백산을 본거지로 항전하였는데 불행히도 경북 순흥에서 왜군에게 잡혀 3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감옥에서 복역중 단식끝에 1912년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유해는 제천 두학동 이강년 묘 아래 안장되었다가 금번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