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7의사총

4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고암동 58-6
탐방로그
의병7의사총은 충북 제천에 있으며, 제천 순국선열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의 주권을 찾기위해 일제와 불굴의 항쟁으로 민족존영의 피묻은 역사를 점철한 한말의 의병운동은 민족사의 자랑스러운 꽃이며 그 역사적 의미는 자못 큰것이다. 바로 이 한말의병운동이 먼저 일어난 곳이 제천이니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한 항일의병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파급되어 이러한 의병항쟁에 있어서 여기 잠들어 있는 7의사는 스스로 의병운동에 뛰어 들어 나라를 지킨 구국의 초석이었다. 7의사는 제천의병진으로 참전하여 충주성을 함락하고 위세를 떨쳤으며 수안보싸움에서는 전군장 정운경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전공을 세웠으나 박달재 싸움에서 불행히도 왜적에게 잡히어 1896년 2월 26일 제천고장숲에서 처형이 되어 순국하였다. 왜적은 잔인하게도 7의사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시신을 동료의병등에 의해 남산후록 갈마골에 합장하니 사람들은 이를 7의사총이라 하였다. 그 7의사는김용이, 김재관, 추성손, 우재봉, 우규하 박원용 오원용이니 유인석의병장은 손수 제문을 지어 이들의 의로운 죽음을 찬양하고 그 혼백과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금번 제천시 사업으로 순국선열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여 정화하는 뜻은 그 선열들이 발휘
한 애국충절의 숭고한 기상을 천추에 전하고자 함이니 의병7의사의 그 충의의 정신은 오겨레의 가슴속에 승화되리라 믿는다.
1984년 갑자11월 순국선열묘 이장추진위원회
의병7의사총
김용이, 김재관, 추성손, 우재봉, 우규하, 박원용, 오원용의 칠의사는 스스로 제천 의병진에 참여하여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수안보 전투에서는 정운경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박달재 전투에서 불행히 일본군에게 잡혀 1896년 2월 26일 제천 고장숲에서 순국하였다. 일본군은 처형한 칠의사의 시신을 불태웠으나 동료 의병들이 이를 거두어 남산 후록 갈마골에 합장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칠의사총(七義士塚)이라고 불렀다.
義兵七義士塚(의병칠의사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