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화 배향 사당 (충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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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산14-3
탐방로그
애국지사 배향 사당 충용사는 충북 음성에 위치해있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순국한 박세화가 배향되어있는 사당이다. 충용사에는 박세화 선생 순도비와 윤응선 선생 사적비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당 박선생 순도비
광제문(光霽門)
하지만 안쪽에는 사람이 찾은 흔적은 전혀없고, 풀만 무성했다.
이곳은 2010년 8월에 충주보훈지청에서 우리고향의 현충시설로 선정된 곳이다.
저 멀리 사당 같은 곳이 보인다.
충용사는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순국한 의당 박세화 선생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홍살문 옆의 설명판이 옆쪽에 떨어져있었다.
박세화선생은 1834년(순조 34)∼1910년. 한말의 의병. 본관은 밀양. 자는 연길(年吉), 호는 의당(毅堂). 함경남도 고원 출신. 경상(景祥)의 8세손이며, 모친은 우씨(禹氏)이다.정통의 위정척사(衛正斥邪)계열 학자로서 서학(西學)의 전파에 대하여 우려하였다.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태백산으로 피하였으며, 1893년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다시 1895년 영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는 등 개혁정치에 반대하였다.또한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문경 산중으로 들어가 거의할 것을 의논하던 중 문경병참소에 붙잡혔다. 곧 한성으로 압송되어 8개월간 구금되었다.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청풍에서 교전중 붙잡혔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곡기를 끊고 단식하여 23일 만에 ‘예의조선(禮義朝鮮)’이란 글을 쓰고 자결하였다.
떨어진 설명판은 비석 뒤 담벼락에서 볼 수 있었다.

충용사[안내판]

이곳은 의당 박세화를 봉안한 사당이다. 박세화(1834~1910)는 자가 연길, 호는 의상, 본관은 밀양.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윤응선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망국의 비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한 순국열사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충용사는 1964년에 건립되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충용사라 현액 하였고, 소슬삼문은 광제문이라 하였다. 충용사에는 의당 박세화, 매당 윤응선, 직당 신현국, 명와 정규해, 정화 송달용을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