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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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347
탐방로그
청산3.1독립만세운동기념탑은 청산백운공원 안에 있으며, 약 500m 떨어진 곳에 청산버스공용터미널 정류장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등록문화재 제394호 / 조선 말기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불원복 태극기" [19세기말 추정]

등록문화재 제483호 / 영국 출신 항일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배설)이 남긴 "배설 유품 태극기" [1900~1909 추정]


등록문화재 제381호 /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 [1942] / 이승만이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만찬회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9호 /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1945] / 광복군 제3지대 2구대에서 활동하던 문웅명 대원의 부대이동을 아쉬워한 동료 대원들이 서명해준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468호 / 왕실이 명신여학교에 하사한 설립 기념 태극기 [1906]

등록문화재 제384호 / 동덕여자의숙 개교 태극기 [1908] / 동덕여자의숙 개교 때 게양된 태극기


대한민국 제헌국회 서정희 의원 태극기 [1948] / 대한민국 제헌국회 서정희 의원이 지녔던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91호 / 6.25전쟁 당시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1950] / 경주지역에서 자원한 학도병 용사들의 서명이 적힌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5호 / 3.1운동 태극기 목판 [1919] / 3.1운동 당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대량으로 태극기를 지어내던 희귀한 목판

등록문화재 제386호 / 독립운동가 남상락 자수 태극기 [1919] / 4.4독립만세운동 때 사용한 태극기로, 그의 부인이 직접 수를 놈


등록문화재 제393호 / 6.25전쟁 당시 특무상사 이철희 사변폭발 태극기 [1950] / 특무상사 이철희가 지니고 있던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92호 / 건국법정대학법학도 서명문 태극기 [1950] / 목판으로 찍어낸 태극기에 학도병을 지원한 학생들이 서명한 것
등록문화재 제395-1호 /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 [1923] /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게양된 것으로 전해지는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87호 / 미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독립만세 삼각태극기" [1930~1940]


등록문화재 제383호 / 미 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 [1950] / 6.25전쟁 당시 미 해병대원 버스비어가 서울의 한 시민에게서 선물 받은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90호 / 6.25전쟁 당시 유관종부대원 태극기 [1950] / 6.25전쟁 중인 1950년 10월 초 육군 소위 유관종이 호남지구 진격작전 때 사용한 태극기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347에 위치한 청산3.1독립만세공원(청산백운공원) 청산3.1독립만세운동기념탑을 찾았다.
청산백운공원
청산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청산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청산 3.1독립만세운동
고종의 장례일을 앞둔 1919년 3월 1일, 박재호 지사가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보고 고향에 돌아와 3월 26일 태극기 300장을 만들어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으며 고한주, 박동희, 김복만 등과 함께 청산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 고한주, 김철수, 김인수, 박재호, 박동희, 김한주, 안병하, 안소석, 양한기 지사 등이 청산 주민과 인근 면에서 온 장꾼, 학생 등을 규합하여 벌인 시위는 오후 9시경 1,2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청산초등학교 입구에서 장터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수천 명까지 늘었으며 새벽 1시에야 해산하였다. 이어 4월 3일 밤 8시경 수천 명의 시위군중이 헌병주재소 주위에 모여 자정이 넘도록 시위 활동을 하다가 헌병주재소를 기습하여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시위가 격렬하였다. 이를 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발포로 김철수 지사 등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체포된 김인수 지사도 고문으로 순국하는 등 50~60명이 부상을 당했다. 4월 4일에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의 무차별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며 시위가 중단되었다. 이후 헌병대에 주도자 수십 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받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청산 독립만세운동은 충북에서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이었다. 관련한 애국지사는
◆ 백운리 : 박재호, 박동희, 안병하, 신업이, 김홍, 고한주 ◆ 지전리 : 안소석, 안대봉, 손일만 ◆ 인정리 : 김한주
◆ 예곡리 : 김철수, 김인수, 김지수, 최남석 ◆ 보은 삼승 : 양한기 지사이며
임시정부 등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한 우리 고장 출신 독립지사는
◆ 백운리 : 조동호, 권태석 ◆ 청성면 산계리 양한위 지사가 있다.
조국독립을 위한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애국 정신과 숭고한 희생을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기며 기리고자 기념탑을 세운다.
2019.12 청산 3.1독립만세운동 추진위원회
조동호(趙東祜)
(1892.8.4~1954.8.15.)
청산면 백운리 299
건국훈장 독립장(2005)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 1918년 상해에서 여운형등과 신한청년당 조직. 파리 강화회의와 미국 월슨대통령에게 조선독립청원서 영문 작성 제출
-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으로 한일관계 사료집 완성하여 국제연맹에 제출. 독립신문 발간
- 1921년 한중호조사(한국독립과 중국혁명상호협조) 한국 측 대표
- 1922년 김구, 최석순, 여운형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립
- 1925년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코민테른 승인 대표로 모스크바 파견 조선공산당 상해지부 활동 중 1928년 2월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증거인멸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 옥고
- 1934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으로 다시 일경에 검거 징역 2년 6개월 옥고
- 1945년 여운영 등과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건국동맹 창건 중 총독부 경찰에 체포 투옥
- 1945년 8월 16일 일본패망으로 출옥 후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 조직
-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사건 이후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낙향
박재호(朴在浩) (1879.1.21.~1947.9.13.) 청산면 백운리 165 / 건국훈장 애족장(1990), 대통령 표창(1983)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려고 서울에 갔다가 독립선언문 낭독현장을 보고 고향에 돌아와 3월 26일 청산면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태극기를 제작 배포하고 3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침. 이후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물파괴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 1919년 4월 21일 공주 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징역 1년형 선고, 옥고 치름.
김인수(金仁洙) (1887.1.30.~1919.4.4.) 청산면 예곡리 94 / 건국훈장 애국장(1991), 대통령 표창(1982)
1919년 4월 4일 밤 8시경 수천 명의 시위 군중들과 주재소 주위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출동한 일본 헌병이 무차별 발포로 현장에서 5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함. 이 독립만세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청산면에 살던 5~6가구의 일본인 가족들은 헌병 주재소로 도피하였고 주재소 내의 헌병은 엎드려서 계속 발포함. 시위가 끝난 후 많은 참여자들이 포박당하여 주재소 마당에서 잔인한 고문을 받았는데 이때 체포되어 고문 받던 중 현장에서 순국함.
김한주(金漢洲) (1876.9.11.~1962.5.30.) 청산면 인정리 165 / 건국훈장 애족장(1993)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계속 확산되자 여러 동지들과 4월 2일 청산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거사하기로 준비함.
4월 4일 장터에 모인 군중들을 규합하여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경의 무차별 총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부상을 했고 이때 시위 주도자의 한사람으로 체포되어 4월 21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룸.
김철수(金轍洙) (1878.9.9.~1919.4.3) 청산면 예곡리 94 / 건국훈장 애국장(1991), 대통령 표창(1977)
1919년 4월 3일 청산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 시위를 하던 중 일본 헌병의 무차별 발포에 다리에 흉상을 당함. 밤까지 인근 인가에 숨어 있다가 당신으로 다시 주재소에 잠입하여 추녀에 불을 지르는 순간 발각되었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본 헌병의 총칼에 순국함.
안병하(安秉夏) (1891.11.5.~1960.7.15.) 청산면 백운리 288-5 / 건국훈장 애족장(1993)
1919년 4월 2일 박재호, 박동회, 김복만 등과 함께 이웃 면민 수천 명과 함께 만리방천(萬里防川) 둑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이어 4월 3일과 4일에도 다수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다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4월 21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개월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안소석(安小錫) (1886.7.16.~미상) 당시 41세, 청산면 지전리
1919년 4월 2일 청산면에서 김철수가 주도한 만세시위에 손일만, 안대봉 등과 함께 지전리 마을 대표로 참가하여 이날 오후 1시경부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오후 9시경 고한주, 김철수, 김인수, 박재호, 안병하, 박동회, 양한기, 김한주 등과 함께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선도하여 4월 3일 오전 1시경까지 전개하다 체포되어 4월 21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지역 1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양한위(梁漢緯) (1883.4.12.~1949.4.30.) 청성면 산계리 / 건국훈장 애국장(1990)
국내에서 무장투쟁과 상해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금. 1922년 5월 27일 경북지방에서 모금 활동 중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손일만(孫一萬) (1901.10.6.~1966.9.10.) 청산면 지전리
1919년 4월 2일 청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태형(笞刑) 60대를 선고 받음.

안대봉(安大鳳) (19세기 말엽~미상) 당시 21세, 영동군(1919년 지전리 거주)
1919년 4월 2일 청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선고 받음.
박동희(朴東羲) (1896.6.6.~1919.5.6.) 청산면 백운리 158 / 대통령 표창(2018)
박재호, 안병하, 김복만 등과 1919년 4월 2일 장날에 청산만세운동에 참여. 이 날은 이웃면 등에서 모여든 장꾼, 학생들이 오후 1시경부터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군중은 더욱 늘어나 밤까지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다음 날 오전 1시경 해산.
4월 4일 독립만세운동 주도자로 체포되어 대전교도소 수감 후 갖은 고문과 태형(笞刑) 60대를 맞고 1919년 5월 6일 옥사함.
최남석(崔南錫) (19세기 말엽~미상) 당시 27세, 보은군(1919년 예곡리 거주)
1919년 4월 2일 청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태형(笞刑) 90대를 선고 받음.

신업이(申業伊) (19세기 말엽~미상) 당시 21세, 청산면 백운리
1919년 4월 2일 청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4월 29일 태형(笞刑) 60대를 선고 받음.
김지수(金芝洙) (1880.7.11.~1961.8.25.) 청산면 예곡리 80 / 대통령 표창(1993)
1919년 4월 4일 수천 명의 군중과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가 중단되었으며 이때 여러 동지들과 체포되어 1919년 8월 1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위반으로 태형(笞刑) 90대를 선고 받음.
양한기(梁漢紀) (1880.2.10.~1946.2.5.) 보은군 삼승면 / 건국훈장 애족장(1990)
1919년 4월 2일 청산 만세운동에 참여함.

김홍(金洪) (1879~미상)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 대통령 표창(2010)
1919년 4월 2일, 4일에 열린 청산만세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체포되어 1919년 4월 29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대를 선고 받음.
고한주(高漢周) (1895.2.21.~1927.9.9.) 청산면 백운리 286 / 건국훈장 애족장(1993)
1919년 4월 2일 청산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학생을 규합하여 오후 1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동지들과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1919년 12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름.
권태석(權泰錫) (19\895.8.18.~1948.8.23.) 김천군(1919년 백운리 거주) / 건국훈장 애국장(2006)
-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
- 1919년 4월 조선민족대동단 참여, 조선민흥회, 서울청년회, 조선공산당, 신간회 등 단체에서 독립운동 전개.
- 192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선고 받고 옥고
- 1929년 4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6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름.
「해상국가들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게양된 것으로 추정
등록문화재 제382호 / 고종이 미국인 외교고문 오웬 데니에게 하사한 "데니 태극기" [1890]
등록문화재 제458호 / 진관사 태극기 [1919] / 2009년 5월 진관사 칠성각의 해체.복원 작업을 할 때 발견된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458호 / 김구 서명문 태극기 [1941] /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서명문이 있는 태극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