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49-1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맞은 뒤 우리민족의 권리의 침탈이 얼마였는지 생존의 위협받음이 얼마이며 생명을 빼앗김이 얼마였던가? 장년은 징용으로 끌려가고 청년학도는 지원병으로 학도병으로 전장의 총알받이가 되었고 부녀자는 정신대로 끌려가고 식량은 공출로 빼앗기고 말과 글을 빼앗기고 성과 이름마저앗아간 것이 왜적이다. 광복을 맞을 때까지 36년의민족의 고통은 하늘을 찌르고 나라는 초토가 되고 유랑하였음이 얼마였던가? 1945년 왜적의 패망으로 광복을 찾았으나 우리의 국운은 빛나지 못했다. 남북분단과 6.25사변 4.19 5.16 12.12사태 등 국가는 표류했고 민생은 고통스러웠다. 삶이 고달팠고 세태가 불안하여 선열들의 유훈을 광복 후 바로 숭모하지 못했다. 1976년 매곡면민은 안상억 류강연의 서 찬으로 의거기념비를 세워 선열의 넋을 위로했으나 향화는 올리지 못했다.2001년1월 10일 매곡면민은 삼일운동 애국지사 숭모회를 조직하고 매년 3월 1일에 선열의 위대한 정신을 되새기고 기념행사를 마친 후군수의 초헌으로 향화의 예를 올리게 되었으나 삼일기념비는 풍화되고 입지가 좋지 않아 매양불락이 되니 2005년 군의원 장종석이 군의원 사업비 3,500만원의 보조로 터를 구입하고 성토하여 이곳에 숭모비를 세우게 되었다. 왜의 침탈에 항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국가아 민족을 위해 몸을 불사르신 선열들의 의거 이후 86년이 지나도록 그 정신을 숭모하지 못한 후배들의 못남이 부끄러울 뿐이었으나 이제 숭모비를 건립하고 향화를 올리게 되었으며, 3.1절 기념식을 이곳에서 거행케된 거은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우리 매곡면이 비록 면세는 약하나 충성심과 의리심과 위선을 하려는 마음은 어느 곳보다 강하고 높음을 알겠다. 이곳이우리 면민의 성역이 되고 학생들의 교육의 장이 되고 선열의 가르침을 받드는 후학들이 속출하기를 빈다. 시의 군수는 손문주이고 면장은 정성식이며 숭모회장 안병찬 부회장 박우천 총무 이광진 정석용이다. 왜적에게 피검되어 옥고를 치룬 선열들은 다음과 같다.
안광덕 형기 1년2개월 대구감옥 1990년도 건국훈장애족장 / 안준 형기 1년6개월 대구감옥 1983년도 건국훈장애족장
안병문 형기 1년3개월 대구감옥 1983년도 건국훈장애족장 / 장복철 형기 1년3개월 대구감옥 1986년도 건국훈장애족장
신상희 형기 1년3개월 대구감옥 1986년도 건국훈장애족장 / 김용선 형기 1년3개월 대구감옥 1986년도 건국훈장애족장
안광덕 형기 1년2개월 대구감옥 1990년도 건국훈장애족장 / 안준 형기 1년6개월 대구감옥 1983년도 건국훈장애족장
안병문 형기 1년3개월 대구감옥 1983년도 건국훈장애족장 / 장복철 형기 1년3개월 대구감옥 1986년도 건국훈장애족장
신상희 형기 1년3개월 대구감옥 1986년도 건국훈장애족장 / 김용선 형기 1년3개월 대구감옥 1986년도 건국훈장애족장
남도학 형기 1년3개월 대구감옥 1983년도 건국훈장애족장
임봉춘 형기 1년2개월 대구감옥 1995년도 건국훈장애족장
이장? 형기 6개월 공주감옥 2005년도
장출봉 형기 6개월 공주감옥 2005년도 대통령표창
김용문 형기 6개월 공주감옥 2005년도
서기 2006년 병술3월1일 순흥후인 안병찬 근찬 근서 헌시
임봉춘 형기 1년2개월 대구감옥 1995년도 건국훈장애족장
이장? 형기 6개월 공주감옥 2005년도
장출봉 형기 6개월 공주감옥 2005년도 대통령표창
김용문 형기 6개월 공주감옥 2005년도
서기 2006년 병술3월1일 순흥후인 안병찬 근찬 근서 헌시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49-14 매곡초등학교 앞
3.1독립운동의거기념비를 찾아왔는데 3.1운동의거숭모비, 6.25참전유공자도 있었다.
3.1독립운동의거기념비를 찾아왔는데 3.1운동의거숭모비, 6.25참전유공자도 있었다.
왼쪽이 3.1 독립운동의거 기념비이고 오른쪽이 3.1독립운동의거 숭모비이다.
3.1독립운동의거 숭모비 앞에는 많은 시비가 서 있었다.
3.1독립운동의거 숭모비
동방의 예의지국이며 반만년의 역사를 지켜온 나라는 국내의 권력다툼과 백성의 무지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1910년 왜적의 침탈로 국권을 잃어 이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뜻있는 인사들의 우국충정은 마침내 1919년 기미삼일독립운동으로 민족의식이 찬연히 빛났다. 33인의 민족대표는 독립을 선언하고 근역 삼천리 방방곡곡에 우리 민족은 자주민족이요 독립국가임을 알게 하고 세계만방에 자주독립 문화민족임을선포하였다. 이 때 매곡면 옥전리 안광덕이 서울시위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귀향하여 같은 마을 안 준과 계책을 세워 13명의 동지와 뜻을모으고 밤을 세워 태극기를 그리고 1,0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매곡면사무소에서 일차 독립만세를 부르고 추풍령 헌병분견대를 습격코자 했으나 거사 일보직전에 의거 주동 인사 11명이체포되고 3명의 피신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이의거는 봉화의 신호가 되고 인근 각 지방민이 호응 봉기하게 되었고 모두에게 애국독립심을 깊이 불어 넣어준 쾌거이다. 중앙의 어떤 지령이나 사주에 의한 봉기가 아니고 자발적인 민족의식의 발로이다. 선열들의 국가독립을 위한 숭고한 정신과 유훈은 후학들의 큰 교훈이요 귀감이다. 아! 국권을 이 민족에게 도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