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택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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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산49-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셨고 일절불굴하시었으니 위국충성과 영렬하신 애족의 공은 우리 한민족의 귀감으로 기리 천추만세까지 빛날것이다. 선생의 이같은 혁혁하신 공적을 뒤늦게나마 알게된 경향에 거주하는 이 지방출신의 수 많은 유지들이 뜻을 모아 추진위와 집행위를 조직하고 선생의 값진 생애와 고귀하신 정신을 한 비에 담아 기리고저 할때에 비문을 불초에게 물음으로 선생은 본인이 평소에 충모해온 존장이시라 체망을 불원하고 부족한 글을 짓는바 특히 본군 최동규군수와 본면 남구현면장및 선생의 문인 정락헌씨와 문중대표 정문택씨의 각별하신 주선과 추진집행위원의 임원 제위의 노력과 그리고 재경 괴산향우회의 김상훈회장을 비롯한 유지제위와 영일정씨 제현의 정성어린 배려로서 이비가 이루어졌으며 이 대지는 안악이씨 대종중에서 기증해주시어서 이 자리에 세우게 된것을 첨언하여 비문에 가름한다.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애국의사 지산 정원택선생 공적비를 찾아왔다.
애국지사 지산 정원택선생 공적비
나라를 빼앗기던 날 이 고장에서 약관의 나이로 망국의 한을 품고 눈물을 삼키며 해외로 탈출하신 분이 계시었으니 그는 바로 우리 괴산이 낳은 독립운동가 정원택선생이시고 그 목적은 나라를 되찾고 민족을 노예로부터 구출하심에 있었으니 당시는 이미 왜적의 마수가 온 강토에 미쳤을때 즉 우리 시골에 그와 같은 대지를 품으신 애국지사가 계실 줄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하였으랴. 선생의 관향은 영일이시며 호는 지산이시고 선조때 전상지호로 유명하신 문청공 송강 정철 선생의 13대손이요 우암 송시열 선생의 고제인 문경공 장암 정호 선생의 9대손이며 위구진사 졸운 정운계공의 차남이시다. 선생은 서기 1890년 경인 9월 27일 중원군 상모면 수면리(당시 연풍군 수면면 원천리)에서 출생하셨고 1930년에 이곳 불갑면 지장리에 이거하셨으니 선산을 따라오심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후로는 항상 비분강개하시던 중 1911년 10월 21세되던 해 왜경의 눈을 피하여 북간도로 건너가셨으니 논산 조소천 선생 권고에 의함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나철 선생의 소명을 받아 중국모범학교에 입학하시어 중국어를 전수하시었고 1913년에는 이상설 선생의 주선으로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 선생을 만나 그 곳 동제사에 입사하시었고 1914년 8월에는 계상학교에서 공부하시었고 익년 1월에는 박달학원서 수학하시다가 동년 5월에 상해 조계국제 왜경탐정에 피체되어 문초를 받으셨고 동년 10월에는 전덕진 홍명희등 제씨와 홍앙을 거쳐1915년 1월에 북진 빈월 남대국 마련 등지에서
고무공장을 인수하시는등 독립운동자금 기반구축에 동분서주 3년여를 전력하시었다. 선생은 평소 시작을 즐기신바 이때 지으신 시 한수에 왈 ..... 이라 하셨으니 당시의 선생의 석잡하신 심정을 헤아릴수 있다. 1915년 월남에서는 안중근의사전을 배포하다가 왜경에 피체되어 고문을 당하신 일이 있고 1917년 11월에는 국내연락차 일시 귀국하였다가 익년 5월에 다시 출국하시어 봉천으로 가셨다. 이때 청태조릉에 오르시어 시한수를 지으셨는데 왈 .......라고 선생의 괴로우신 심경을 표현하셨다. 이곳에서는 ?남 ?주연동지와 농장에도 손을 대셨고 동년 12월에는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예관 신규식선생으로 부터 서북간도 소령 교포에 연락하라는 기밀서류를 받으시고 즉시 길림으로 가시어 여시당 박남파 이동녕 조소앙 김좌진선생등과 회합하여 상해를 중심으로하여 파리에 사절을 파견할것과 국내와 미주를 연락할것등을 토의하고 농장경영차 내도한 김하수를 설득하여 군자금조로 일만금을 얻어내는 한편 길림동지 수십인을 규합하여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시고 여시당을 총재로 김좌진은 군무부장에 선생은 서무부장에 취임하시었고 1918년 3월에는 미주 상해 북경 소령 국경및 본국에 독립선언문 이천매를 석판인쇄해서 밀송하시고 파리평화회의에는 장문80자를 전문으로 타전하셨다. 동년 5월에 신채호선생과 대한주보발간계획을 세우셨고 상해임시정부수립과 더부러 의정원 초대의원에 피선되어었고 이시영 신규식 신채호선생등과 토의하여 기밀사절로 서울에 잠입하시어 활약중 왜경에 피체되어 총감부에 수감되시어 옥고를 치루셨으니 경기철창에 처절하신 영어생활은 나라없는 민족의 설음이 아니고 무었인가. 1925년에야 병보석으로 출감하시어 고향에 돌아와 금족령하에 ??하시면서 광복의 날만을 고대하시며 후진양성등에 진력하시다가 마침내 8.15를 맞아하셨고 해방후는 바로 상경하시어 임정환영위원회 고문을 맡으시고 정부수립과 더부러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초대 감찰위원장직을 제수받으셨으나 이를 사양하시고 위당 정인보선생을 추천하시었다. 1961년에는 광복회원이 되시었고 그후 수년간 대종교 본사 총전교를 역임하시다가 1971년 11월 18일에 서울 흑석동 우사에서 졸하시니 향년은 81세이시고 지장리 선영하에 장하였다. 기후 1963년 3월 정부로부터 독립유공표창장이 수여되었고 1073년 8월 20일부터 11월 7일까지 2개우러간 선생의 해외체임중의 기록이 담긴 지산외유일지가 서울신문에 연재되었으며 197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8집에 지산일지가 수록되었고 1977년에는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와같이 선생은 구국운동으로 시종하시었으니 수방풍토에 노숙충찬의 정이 과연 어떠하였으며 다년간의 옥고와 누차에 걸친 왜적의 혹독한 형장지하에도 지사불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