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사당(충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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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1
탐방로그
충의사는 윤봉길의 의거와 애국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립되었으며,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사당 전방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윤봉길 의사 생가 및 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소민족의 해방과 자유평등을 외치며 월례강연을 열어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1929년 봄학예회에서 토끼와 여우를 강연하면서 우리나라와 일본제국주의를 비유 풍자하다가 일경에게 잡히어 곤욕을 치르고 감시를 받게되자 매헌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이란 유서를 남기고 23세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만주와 청도를 거쳐 이듬해 8월 상해로가 상해영어학교에 다니는 한편 임시정부의 상황을 탐문하던중 안공근과 박진의 주선으로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서 간담상조 의기상통하였다. 이때 상해 주둔 일본군은 ??천황의 생일경축식 거행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헌은 일본군의 수뇌부를 폭사시키로 결심하고 한인애국단에 엄숙히 선서하고 4월 29일 물통과 도시락으로 가장한 폭탄두개를 가지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홍구공원에 들어갔다.식이 시작되고 일본의 국가가 울려퍼질때 단상을 향하여 폭탄을 던지니 폭음과 함께 식장은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사령관 白川義則(시라카와 요시노리)과 거류민단장 河瑞(가와바타)은 폭사하고 重光공사등 십여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를 바라본 매헌은 가슴에 품었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는 건곤일척의 쾌거였고 그 굉음은 상해는 물론 중국 천지와 온세계를 뒤흔들었다. 5월 25일 일본군법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매헌은 너희와 우리는 역사와 풍속과 언어가 다른 이민족이다. 너희가 우리를 통치한다는것은 극동의 평화를 파괴하고 인류의 자유를 말살하는 야만적 행동이라고 꾸짖었다. 곧 일본에 호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金澤(가나자와)교외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니 향년 25세였다. 매헌은 죽음에 앞서 엄숙한 표정으로 남아로서 당연한 일을 하였으니 만족하게 느낄뿐이라고 하였다. 이때 고향에서는 저한당의 대문 떳장이 부러지고 장군봉이 무너지는 이변이 있었으니 어머니 김원상여사는 내 아들은 죽지않았다. 이 나라 이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것이라고 숙연히 말씀하였다. 이 의거로 말미암아 중국을 위시하여 온대륙들은 우리 임시정부를 적극으로 후원하고 국제연맹은 일본을 극동의 침략자로 규정하였으며 장개석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못한 일을 한국의 한청년이 했다고 찬양하였고 중국 낙양군관학교에 1933년 한국광복군 특별반을 창설했으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즉시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조국이 광복이 되자 1945년 5월 매헌의 유해는 일본으로부터 고국에 본환하여 국민장으로 서울 효창공원에 모시고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하였다. 1965년 매헌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1968년에 충의사를 창건하였으며 196?년에 유품 유묵 53점이 보물 제568호로 광현당, 저한당과 부흥원및 충의사가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충의사경내에는 매헌 농민 매헌기념관, 충의관, 매헌기념탑이 세워졌다. 한편 재단법인 매헌장학재단이 육영사업을 펴고 사단법인 매헌기념사업회와 월진회는 해마다 추모제와 매헌문화제를 거행하여 이곳을 독립운동의 요람지로 가꾸어 그 업적을 길이 선양하고 있다. 매헌의 그리던 조국의 광복이 이룩된지 35년, 아직 분단의 슬픔을 안고 있지만 그 동안 우리나라는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였다. 매헌이 순국한지 102년을 맞아하여 매헌기념사
업회는 대한민국 원호처와 국회의원 윤석순, 주식회사 삼익주택 이종조, 주식회사 대지 정동우의 헌석을 받아 김동욱은 글을 짓고 김영기는 글씨를 써서 이 비를 세우다.

다음은 농민독본의 한 구절

1. 나는농부요 너는 노동자다.우리는 똑같은 일하는 사람이다. 높지도 낮지도 아니하다. 나는 밭을 갈고 너는 쇠를 다룬다. 우리는 세상이 잘 되도록 쉬지말고 일을 하자. 천가지 만가지로 낡고 물들고 더럽고 못생긴 것을 무찔러 버리고 새롭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놓자
2.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사람은 천부의 자유가 있다. 머리에 돌이 눌리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자유의 세상을 우리가 찾는다.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낳아진다.
매헌기념관 앞에 있는 광현천하대장군, 저한천하대장군
광현당은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생가의 당호이고, 저한당은 의사가 4살부터 성장한 집의 당호이다.
기념관 입구에는 예덕상무사 보부상 유물전시관이 있었다.
기념관 옆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탑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40-1 윤봉길 의사 사당 충의사를 찾아왔다.
3곳의 사적지가 모두 인접해 있었다.
성주배씨 용순(안나)지묘
매헌 윤봉길 의사 사적비
가야산 덕룡봉의 영산에 에워싸인 이마을 목바리에서 의사 매헌 윤봉길은 태어났다. 마을에서는 지도자로 농촌운동에 앞장서고 1932년 상해에서는 폭탄을 품고 사지에 들어가 일본군의 수뇌부를 폭살시키어 우리나라 국권회복의 대의를 박히고 25세로 민족을 위하여 산화하니 참으로 살신성인의 충이었다. 매헌은 6진을 개척한 고려의 공신 문숙공 윤관장군의 27세손이요 파평 윤황공과 경주 김원상여사의 장남으로 1908년 6월 21일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본명은 우의요 자는 용기이며 매헌은 아호이고 봉길은 별명이다. 어려서 어머니의 엄격한 훈도를 받았고 성품이 강직하여 옳은 일에는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백부 윤경공에게 글을 배우고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시위를 벌이고 학교를 자퇴하여 한문을 배우다가 14세에 오치서숙에서 매곡 성주록선생에게 경서와 시문을 익히는 한편 신학문의 습듣도 게을리하지않았으니 농촌운동의 경륜과 이상의 기틀이 여기서 잡혔다. 15세에는 성주 배용순과 결혼하여 아들 종을 두었다. 17세에는 오추와 옥수등 한시집을 펴내고 학문이 깊어짐에 따라 수신치국의 대도를 깨닫고 자기의 갈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은 성찰을 하였다. 어느날 오치서숙앞에 한청년이 공동묘지의 묘표를 분별없이 뽑아들고와 자기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달라하니 자기 아버지의 무덤은 커녕 다른 사람의 무덤도 구별할수 없게되자 매헌은 크게 충격을받았다. 이 청년의 무식함으로 부모의 묘를 잃고, 우리 겨레는 무식함으로 나라를 잃었음을 깨달은 매헌 문맹퇴치와 농촌운동에 앞장서기로 다짐하였다. 19세에 오치서숙을 마친 뒤,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곧 야학을 열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서느 한편 황조운, 정종갑, 윤은의등과 함께 월진회와 수암체육회및 목계구매조합을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펴고 다시 이를 한데 묶어 1929년 부흥원을 세우고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애국사상을 길렀으며 모든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