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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 산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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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당이남규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이 3대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97년 9월 이 비를 세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 뒤에 자신도 그 아래에 묻혔다. 향년은 84세였다. 오호라 이 한산이씨조 자손 3대에 걸친 항일사적은 참으로 거룩하다. 멀리 목은 아계와 같은 명현석보가 이 가문에 긴 원류를 이루었고 지금 이 조자손 3대의 거룩한 정신이 그 속에서 나왔지만 이 어찌 한 가문만의 빛이 될 뿐이리오 실로 이곳 예산에 깊은 뿌리가 되어 민족정기를 발산시킴으로써 이 고장이 나라의 발전에 끊임없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1997년 9월 일
대한민국 학술원회장 민족문화추진회장
여주 이우성 삼가 지음, 진양 하한식 삼가 씀, 경주 이재영 삼가 새김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가 충청남도와 예산군의 보조를 얻어 이 비를 세움
1997년 9월 일
대한민국 학술원회장 민족문화추진회장
여주 이우성 삼가 지음, 진양 하한식 삼가 씀, 경주 이재영 삼가 새김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가 충청남도와 예산군의 보조를 얻어 이 비를 세움
수당 이남규 선생 3대 항일투쟁 사적비 - 국가보부 지정 현충시설
이 기념비는 1997년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수당 이남규-이충구-이승복 3대에 걸친 독립 지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수당 이남규 선생과 큰 아들 이충구는 홍주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의병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이남규와 이충구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병장 민종식의 행방을 말하지 않고 보호하였으며, 공주 감옥에서 석방된지 10여 일도 안 돼서 일본군에게 다시 체포된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는 일제의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아산시 송악면 평촌냇가에서 잔인한 일제의 칼날에 순국하였다.
이승복은 수당 이남규의 장손으로 1927년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신간회에서는 선전부 총무간사라는 중책을 맡았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상해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희망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 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수당 이남규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충구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승복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관리번호: 23-01-46
관리자: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
이 기념비는 1997년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수당 이남규-이충구-이승복 3대에 걸친 독립 지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수당 이남규 선생과 큰 아들 이충구는 홍주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의병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이남규와 이충구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병장 민종식의 행방을 말하지 않고 보호하였으며, 공주 감옥에서 석방된지 10여 일도 안 돼서 일본군에게 다시 체포된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는 일제의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아산시 송악면 평촌냇가에서 잔인한 일제의 칼날에 순국하였다.
이승복은 수당 이남규의 장손으로 1927년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신간회에서는 선전부 총무간사라는 중책을 맡았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상해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희망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 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수당 이남규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충구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승복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관리번호: 23-01-46
관리자: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
修堂 李南珪 先生 三代 抗日鬪爭 事蹟碑
(수당 이남규 선생 삼대 항일투쟁 사적비)
(수당 이남규 선생 삼대 항일투쟁 사적비)
修堂 李南珪 先生 三代 抗日鬪爭 事蹟碑
(수당 이남규 선생 삼대 항일투쟁 사적비)
(수당 이남규 선생 삼대 항일투쟁 사적비)
한 뒤에 자신도 그 아래에 묻혔다. 향년은 84세였다. 오호라 이 한산이씨조 자손 3대에 걸친 항일사적은 참으로 거룩하다. 멀리 목은 아계와 같은 명현석보가 이 가문에 긴 원류를 이루었고 지금 이 조자손 3대의 거룩한 정신이 그 속에서 나왔지만 이 어찌 한 가문만의 빛이 될 뿐이리오 실로 이곳 예산에 깊은 뿌리가 되어 민족정기를 발산시킴으로써 이 고장이 나라의 발전에 끊임없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1997년 9월 일
대한민국 학술원회장 민족문화추진회장
여주 이우성 삼가 지음, 진양 하한식 삼가 씀, 경주 이재영 삼가 새김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가 충청남도와 예산군의 보조를 얻어 이 비를 세움
1997년 9월 일
대한민국 학술원회장 민족문화추진회장
여주 이우성 삼가 지음, 진양 하한식 삼가 씀, 경주 이재영 삼가 새김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가 충청남도와 예산군의 보조를 얻어 이 비를 세움
한 뒤에 자신도 그 아래에 묻혔다. 향년은 84세였다. 오호라 이 한산이씨조 자손 3대에 걸친 항일사적은 참으로 거룩하다. 멀리 목은 아계와 같은 명현석보가 이 가문에 긴 원류를 이루었고 지금 이 조자손 3대의 거룩한 정신이 그 속에서 나왔지만 이 어찌 한 가문만의 빛이 될 뿐이리오 실로 이곳 예산에 깊은 뿌리가 되어 민족정기를 발산시킴으로써 이 고장이 나라의 발전에 끊임없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1997년 9월 일
대한민국 학술원회장 민족문화추진회장
여주 이우성 삼가 지음, 진양 하한식 삼가 씀, 경주 이재영 삼가 새김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가 충청남도와 예산군의 보조를 얻어 이 비를 세움
1997년 9월 일
대한민국 학술원회장 민족문화추진회장
여주 이우성 삼가 지음, 진양 하한식 삼가 씀, 경주 이재영 삼가 새김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가 충청남도와 예산군의 보조를 얻어 이 비를 세움
계기로 왜적과 그 주구들이 온갖 위협과 회유로 선생을 포섭하려다가 그것이 도저히 안될 줄 알고는 백여 왜병으로 대술면 한곡의 평원정을 포위하고 선생을 납치하여 죽음과 굴종의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선생은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되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대사한 끝에 드디어 우해하였다. 이때 선생을 모시고 가던 장남과 하인이 동시각에 모두 적의 흉도 아래 병사하였다. 이것이 1907년 9월 26일 아산 송악면 평촌 냇가에서였다. 선생의 장남은 휘가 충구이고 호는 유재이다. 그는 일찍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다른 부형을 받들면서 자재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관도의 진출에 급급할 수 없었다. 수당 선생이 공주감옥에 구금되었을 때 왜의 관헌이 장남인 유재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면서 민종식의 소재를 알리라고 했지만 유재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수당 선생에 대한 적의 감시가 날로 위험의 의도를 더해가자 유재는 소심 익익성효를 다하면서 곁을 떠나지 않더니 필경 평촌 냇가에서의 참하를 당하였다. 적의 칼날이 부친의 신상에 범하려하자 유재는 몸으로 가로 막았고 다시 그 위를 하인 김응길이 덮어으나 결국 차례로 적의 잔인한 손에 희생되었다. 아아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죽었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죽었으며 하인은 상전을 위해 죽었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죽음이여 충과 효와 의의 권화인 그 죽음들이며. 이러한 가문에서 자 흥손은 그 통한이 어떠했을까 유재의 장남이요 수당의 장손인 휘 승복은 호가 평주이다. 겨우 13세에 ○극의 화를 입은 그는 일찍부터 국가와 부조의 원수를 갚을는 강한 의지를 품었다. 서울로 올라가 상동청년학원 휘문의숙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육을 받은 다음 약관의 나이에 로서아로 나가 보재 이상설 석오 이동녕의 밑에서 광복을 도모하다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연통제 비밀조직에 가담하였다. 29세에 귀국한 뒤 언론계에 투신하여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거쳐 월남 이상재 주재하의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취임하여 안재홍 한기악 이관구 등과 경영에 참여하였다. 한편 민족 단일 전선인 신간회를 발기한 주역의 일원으로 홍명희와 함께 강령과 규약을 만들고 선전부 총무 간사로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1945년 3월에 예비검속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8.15해방과 함께 자유를 찾아 다시 건국사업에 분주한 평주는 조선국민당 한국독립당 등 정당의 주요직책을 맡기도 했으나 민족분단과 사회혼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호연히 이곳 향리로 돌아왔다. 6.25동란 중에 해병장교인 장남 장원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원산에서 전사하자 더울 세상에 뜻을 잃고 오직 선사에 유의하여 수당집을 발간하고 한곡에 있는 수당 유재의 묘역을 정화
이 곳 예산은 기호일대의 명향으로 옛부터 많은 인걸을 배출하여 우리나라 역사상에 광채를 더 하였다. 특히 구한말엽에 시대를 약간 선후한 양당이 있었으니 완당 김정희 선생과 수당 이남규 선생이다. 완당은 담계옹 방강운대완원의 청조 경학 내지 금석학을 받아들여 실사구시학을 이룩하는 한편 우리나라 서법 예술의 신기축을 열었고 수당은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의 근기학풍 즉 경세치용학을 이어받고 겸하여 우리나라 고문 문장의 최고 수준을 달성하였다. 이와 같이 서예와 문장도의 쌍벽을 이룬 양당은 예산의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사의 빛나는 기록이 된다. 흔히 근세의 문장을 논할 때에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 영재 이건창과 함께 수당을 열거하여 4대가로 칭하거니와 그 중에서 수당은 현직 관인으로 국보간난한 비탈길에서 심애치성으로 가차없는 현실파악과 조리있는 사실서술과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함으로써 소차를 위시한 그의 산문문학은 역사적으로 불멸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존재를 영원히 살아있게 한 것은 그의 충절이다. 충절이라고 하여 유교사회의 일반적 충절이야기 아니다. 극진한 애국순성으로 일관된 생애와 장렬한 순국의 최후가 그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안동관찰사 함경도 안무사 궁내부 특진관을 거치면서 한 관인으로 정사에 최선을 다하여 나라를 붙들려고 했지만 그것이 안되자 향리에 돌아와 의병운동과 성기를 통하여 외세를 배격하려하였다. 홍주의병장 민종식을 집에 숨겨 보호하면서 대왜투쟁을 획책한 것을
수당 이남규 선생 3대 항일투쟁 사적비 - 국가보부 지정 현충시설
이 기념비는 1997년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수당 이남규-이충구-이승복 3대에 걸친 독립 지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수당 이남규 선생과 큰 아들 이충구는 홍주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의병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이남규와 이충구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병장 민종식의 행방을 말하지 않고 보호하였으며, 공주 감옥에서 석방된지 10여 일도 안 돼서 일본군에게 다시 체포된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는 일제의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아산시 송악면 평촌냇가에서 잔인한 일제의 칼날에 순국하였다.
이승복은 수당 이남규의 장손으로 1927년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신간회에서는 선전부 총무간사라는 중책을 맡았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상해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희망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 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수당 이남규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충구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승복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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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
이 기념비는 1997년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수당 이남규-이충구-이승복 3대에 걸친 독립 지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수당 이남규 선생과 큰 아들 이충구는 홍주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의병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이남규와 이충구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병장 민종식의 행방을 말하지 않고 보호하였으며, 공주 감옥에서 석방된지 10여 일도 안 돼서 일본군에게 다시 체포된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는 일제의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아산시 송악면 평촌냇가에서 잔인한 일제의 칼날에 순국하였다.
이승복은 수당 이남규의 장손으로 1927년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신간회에서는 선전부 총무간사라는 중책을 맡았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상해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희망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 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수당 이남규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충구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승복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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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堂 李南珪 先生 三代 抗日鬪爭 事蹟碑
(수당 이남규 선생 삼대 항일투쟁 사적비)
(수당 이남규 선생 삼대 항일투쟁 사적비)
修堂 李南珪 先生 三代 抗日鬪爭 事蹟碑
(수당 이남규 선생 삼대 항일투쟁 사적비)
(수당 이남규 선생 삼대 항일투쟁 사적비)
충남 예산군 대술면 시산리 산 115
수당 이남규 선생 3대 항일투쟁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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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
이 기념비는 1997년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수당 이남규-이충구-이승복 3대에 걸친 독립지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수당 이남규 선생과 큰 아들 이충구는 홍주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의병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이남규와 이충구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병장 민종식의 행방을 말하지 않고 보호하였으며, 공주 감옥에서 석방된지 10여 일도 안 되서 일본군에게 다시 체포된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는 일제의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아산시 송악면 평촌 냇가에서 잔인한 일제의 칼날에 순국하였다.
이승복은 수당 이남규의 장손으로 1927년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신간회에서는 선전부 총무간사라는 중택을 맡았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 · 상해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희망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수당 이남규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충구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승복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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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는 1997년 수당 이남규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수당 이남규-이충구-이승복 3대에 걸친 독립지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수당 이남규 선생과 큰 아들 이충구는 홍주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의병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이남규와 이충구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병장 민종식의 행방을 말하지 않고 보호하였으며, 공주 감옥에서 석방된지 10여 일도 안 되서 일본군에게 다시 체포된 이남규와 그의 아들 이충구는 일제의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아산시 송악면 평촌 냇가에서 잔인한 일제의 칼날에 순국하였다.
이승복은 수당 이남규의 장손으로 1927년 민족연합전선 조직인 신간회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신간회에서는 선전부 총무간사라는 중택을 맡았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 · 상해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희망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수당 이남규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충구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승복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 곳 예산은 기호일대의 명향으로 옛부터 많은 인걸을 배출하여 우리나라 역사상에 광채를 더 하였다. 특히 구한말엽에 시대를 약간 선후한 양당이 있었으니 완당 김정희 선생과 수당 이남규 선생이다. 완당은 담계옹 방강운대완원의 청조 경학 내지 금석학을 받아들여 실사구시학을 이룩하는 한편 우리나라 서법 예술의 신기축을 열었고 수당은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의 근기학풍 즉 경세치용학을 이어받고 겸하여 우리나라 고문 문장의 최고 수준을 달성하였다. 이와 같이 서예와 문장도의 쌍벽을 이룬 양당은 예산의 자랑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사의 빛나는 기록이 된다. 흔히 근세의 문장을 논할 때에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 영재 이건창과 함께 수당을 열거하여 4대가로 칭하거니와 그 중에서 수당은 현직 관인으로 국보간난한 비탈길에서 심애치성으로 가차없는 현실파악과 조리있는 사실서술과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함으로써 소차를 위시한 그의 산문문학은 역사적으로 불멸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존재를 영원히 살아있게 한 것은 그의 충절이다. 충절이라고 하여 유교사회의 일반적 충절이야기 아니다. 극진한 애국순성으로 일관된 생애와 장렬한 순국의 최후가 그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안동관찰사 함경도 안무사 궁내부 특진관을 거치면서 한 관인으로 정사에 최선을 다하여 나라를 붙들려고 했지만 그것이 안되자 향리에 돌아와 의병운동과 성기를 통하여 외세를 배격하려하였다. 홍주의병장 민종식을 집에 숨겨 보호하면서 대왜투쟁을 획책한 것을
계기로 왜적과 그 주구들이 온갖 위협과 회유로 선생을 포섭하려다가 그것이 도저히 안될 줄 알고는 백여 왜병으로 대술면 한곡의 평원정을 포위하고 선생을 납치하여 죽음과 굴종의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선생은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되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대사한 끝에 드디어 우해하였다. 이때 선생을 모시고 가던 장남과 하인이 동시각에 모두 적의 흉도 아래 병사하였다. 이것이 1907년 9월 26일 아산 송악면 평촌 냇가에서였다. 선생의 장남은 휘가 충구이고 호는 유재이다. 그는 일찍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다른 부형을 받들면서 자재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관도의 진출에 급급할 수 없었다. 수당 선생이 공주감옥에 구금되었을 때 왜의 관헌이 장남인 유재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면서 민종식의 소재를 알리라고 했지만 유재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수당 선생에 대한 적의 감시가 날로 위험의 의도를 더해가자 유재는 소심 익익성효를 다하면서 곁을 떠나지 않더니 필경 평촌 냇가에서의 참하를 당하였다. 적의 칼날이 부친의 신상에 범하려하자 유재는 몸으로 가로 막았고 다시 그 위를 하인 김응길이 덮어으나 결국 차례로 적의 잔인한 손에 희생되었다. 아아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죽었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죽었으며 하인은 상전을 위해 죽었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죽음이여 충과 효와 의의 권화인 그 죽음들이며. 이러한 가문에서 자 흥손은 그 통한이 어떠했을까 유재의 장남이요 수당의 장손인 휘 승복은 호가 평주이다. 겨우 13세에 ○극의 화를 입은 그는 일찍부터 국가와 부조의 원수를 갚을는 강한 의지를 품었다. 서울로 올라가 상동청년학원 휘문의숙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육을 받은 다음 약관의 나이에 로서아로 나가 보재 이상설 석오 이동녕의 밑에서 광복을 도모하다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연통제 비밀조직에 가담하였다. 29세에 귀국한 뒤 언론계에 투신하여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거쳐 월남 이상재 주재하의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취임하여 안재홍 한기악 이관구 등과 경영에 참여하였다. 한편 민족 단일 전선인 신간회를 발기한 주역의 일원으로 홍명희와 함께 강령과 규약을 만들고 선전부 총무 간사로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1945년 3월에 예비검속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8.15해방과 함께 자유를 찾아 다시 건국사업에 분주한 평주는 조선국민당 한국독립당 등 정당의 주요직책을 맡기도 했으나 민족분단과 사회혼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호연히 이곳 향리로 돌아왔다. 6.25동란 중에 해병장교인 장남 장원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원산에서 전사하자 더울 세상에 뜻을 잃고 오직 선사에 유의하여 수당집을 발간하고 한곡에 있는 수당 유재의 묘역을 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