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17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상설 석오 이동녕 제 선배 밑에서 광복을 주모하다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연통제 비밀조직에 가담하였다. 승평 6대주를 의미하는 평주라는 아호는 이 무렵 성재 이시영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29세에 환국하여 김상옥 열사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고 풀린 뒤에 신사상 연구회를 통하여 신사상의 보급에 주력했으며 곧이어 언론계에 투신하여 동아일보 조사부장과 시대일보 상무이사를 거쳐 민세 안재학 월봉 한기악 두 분과 함께 조선일보사의 경영에 착수하여 이사 겸 경영국장을 맡았다. 한편 민족 단일 전선인 신간회를 발기하여 막후에서 강령 및 제 규정을 만들고 선전부 총무간사로서 실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의 경력은 항상 일제의 감시를 받아왔거니와 1945년 3월 예비검속으로 영어의 몸이 되어 8.15 해방 때에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다시 건국 사업에 분주하게 된 공은 조선 국민당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제 정당에 직책을 갖게 되고 민주일보 부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 분단과 사회 혼란속에 그릇되어가는 현실과 타협할 수 없어 1948년 호연히 향원으로 돌아왔다. 6.25 난중에 장남 장원이 해병장교로서 전사한 뒤에 차남 문원이 중앙대학교수로서 효성으로 봉양하더니 1978년 10월 31일 서울 강남구 방배동 우사에서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부인은 양천허씨이며 자녀는 2남 3녀이니 남은 장원 문원이고 녀는 숙원 예원 희원이다. 오호라
공의 무덤은 곧 수당 유재 두 어른 영하이니 조자손 3대의 높고 거룩함이 이 비역의 만년의 안고를 기약할
공의 무덤은 곧 수당 유재 두 어른 영하이니 조자손 3대의 높고 거룩함이 이 비역의 만년의 안고를 기약할
것이며 민족의 정기가 길이 이 고장 산천에서 용솟음쳐 나올 것이다.
1983년 5월 일 여주 이우성 짓고 안동 김충현 쓰다
1983년 10월 31일 아들 문원이 충청남도와 예산군의 보조를 받아 이 비를 세우다
1983년 5월 일 여주 이우성 짓고 안동 김충현 쓰다
1983년 10월 31일 아들 문원이 충청남도와 예산군의 보조를 받아 이 비를 세우다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산 7-1 양지말마을 남쪽구릉 이남규 삼절묘를 찾아가고 있다.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산 7-1은 너무 넓은 번지이고, 방산리 177이 삼절묘로 들어가는 입구 길이다.
이곳의 이남규 삼절묘로서 수당 이남규 지사, 아드님 이충구 지사, 교구꾼 김응길 3분의 묘소를 일컷는 이름이다.
하지만 묘소는 모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현재에는 구 묘비들만 남아있다고 한다.
또 수당 선생의 손자이신 애국지사 이승복의 묘비도 이곳에 있다.
하지만 묘소는 모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현재에는 구 묘비들만 남아있다고 한다.
또 수당 선생의 손자이신 애국지사 이승복의 묘비도 이곳에 있다.
平州 先生 韓山李公 昇馥 之墓(평주 선생 한산이공 승복 지묘)
이 언덕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이면에 중요한 인물으 한 분으로 독립운동과 언론 창달에 그 일생을 바치신 평주 선생 이승복 공이 영원히 잠드신 곳이다. 1895년 7월 10일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문곡 한산이씨가에서 수당공의 장손이요 유재공의 장자로 출생한 공은 겨우 13세에 조부와 부친의 장렬한 순국을 당하여 어린 가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로부터 남달리 일찍 국가민족에 헌신할 뜻을 굳히게 되었다. 휘문의숙 청년학원 대동법률전문 등 학교의 교육을 받은 다음 약관의 나이에 俄領(아령,러시아)으로 나가 보재 이
이 언덕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이면에 중요한 인물으 한 분으로 독립운동과 언론 창달에 그 일생을 바치신 평주 선생 이승복 공이 영원히 잠드신 곳이다. 1895년 7월 10일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 문곡 한산이씨가에서 수당공의 장손이요 유재공의 장자로 출생한 공은 겨우 13세에 조부와 부친의 장렬한 순국을 당하여 어린 가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로부터 남달리 일찍 국가민족에 헌신할 뜻을 굳히게 되었다. 휘문의숙 청년학원 대동법률전문 등 학교의 교육을 받은 다음 약관의 나이에 俄領(아령,러시아)으로 나가 보재 이
상설 석오 이동녕 제 선배 밑에서 광복을 주모하다가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연통제 비밀조직에 가담하였다. 승평 6대주를 의미하는 평주라는 아호는 이 무렵 성재 이시영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29세에 환국하여 김상옥 열사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고 풀린 뒤에 신사상 연구회를 통하여 신사상의 보급에 주력했으며 곧이어 언론계에 투신하여 동아일보 조사부장과 시대일보 상무이사를 거쳐 민세 안재학 월봉 한기악 두 분과 함께 조선일보사의 경영에 착수하여 이사 겸 경영국장을 맡았다. 한편 민족 단일 전선인 신간회를 발기하여 막후에서 강령 및 제 규정을 만들고 선전부 총무간사로서 실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의 경력은 항상 일제의 감시를 받아왔거니와 1945년 3월 예비검속으로 영어의 몸이 되어 8.15 해방 때에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다시 건국 사업에 분주하게 된 공은 조선 국민당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제 정당에 직책을 갖게 되고 민주일보 부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 분단과 사회 혼란속에 그릇되어가는 현실과 타협할 수 없어 1948년 호연히 향원으로 돌아왔다. 6.25 난중에 장남 장원이 해병장교로서 전사한 뒤에 차남 문원이 중앙대학교수로서 효성으로 봉양하더니 1978년 10월 31일 서울 강남구 방배동 우사에서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부인은 양천허씨이며 자녀는 2남 3녀이니 남은 장원 문원이고 녀는 숙원 예원 희원이다. 오호라
공의 무덤은 곧 수당 유재 두 어른 영하이니 조자손 3대의 높고 거룩함이 이 비역의 만년의 안고를 기약할
공의 무덤은 곧 수당 유재 두 어른 영하이니 조자손 3대의 높고 거룩함이 이 비역의 만년의 안고를 기약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