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제일 앞쪽에 있는 순국선열 일우 김한종 의사의 묘
순국선열 일우 김녕김씨 한종지묘
순국선열의 고귀한 투쟁과 살신성인의 거룩한 희생이 없었다면 어찌 왜에게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을수 있었으며 오늘의 민족중흥이 있으리오. 신출귀몰한 조국광복투쟁끝에 사형순국으로 살신성인하사 조국광복을 이룩하신 김한종의사가 여기에 잠드셨다. 의사의 호는 일우요 자는 경수요 본은 김녕이니 경순왕의 예손으로 방언, 치화 양대 효자는 그 7대조, 6대조요 민병진사는 5대조요 휘 제, 휘 상은, 휘 정묵은 고조,증조및 조효이시다. 1883년 음 1월 14일 이곳 신흥리 70번지에서 홍주의병장 겸 소모관 백하 김재정선생과 유인 광주안씨 사이의 독자로 태어나셨다. 천성이 강직과감하시고 소절에 구애되지않으셨고 위풍이 당당하셨다. 11세에 이미 대의에 통하시더니 자라시매 왜적에게 나라를 빼앗긴 분을 참을 수 없어 국권회복에 신명을 바칠 결의를 하시고 1916년 이철영, 이온, 김경태, 김재욱, 우덕상씨등과 왜총독을 살해할 계획을 세워 권총, 폭탄등
을 중국에서 구입하시었다. 왜경의 가택수색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1917년 경상도에 피신히시어 박상진, 채기중선생과 만나 광복회를 조직하고 그해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박상진, 채기중, 장두환, 경창순, 김좌한, 노백린, 김경태, 김재욱, 김재풍등과 전국에서 모인 300여 애국지사와 더부러 오인은 대한광복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함은 물론 오인의 일생에 목적을 이루지 못할시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수적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하기까지 절대불변하고 일심육력할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함이라고 피를 뽑아 맹서한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기로 하여 김좌한장군을 만주에, 노백린장군을 중국에 보내어 무관학교를 세우셨다. 대한광복회의 기호지방 책임과 군비조달 총책임을 지시고 세전전답을 팔아 괴산, 인천, 서울, 경주등에 연락소를 설치하고 국내외 동지들과 긴밀히 연락하는 한편 향제에서 전국 부호 160명에게 군비분담 통고문을 발송하고 동서사방 시눌귀몰하는 활동으로 많은 군비조달을 하여 만주와 중국의 광복군에게 보내어 왜군을 무찌르게 하는 한편 친일분자들을 응징하여 동포로 하여금 경각케하고 왜로 하여금 벌벌떨게하셨으며 2000만동포로 하여금 이제야 광복된다고 기뻐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동지의 가족의 잘못으로 1918년 1월 27일 박상진, 채기중, 김경태, 장두환, 김재풍, 김재욱, 김원묵, 김재인, 성달영, 정태복, 황학성, 이재덕, 성문영씨등 75인과 함께 체포되셨으나 그 모진 고문에도 입을 다문채 타동지들에 의하여 이미 밝혀진 사실이외는 불지않으셨다. 그러므로 의사의 투쟁상은 하늘만이 알고 전할길이 없음이 더욱 안타깝다. 1920년 9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되어 1921년 8월 11일(음 7월 8일) 형집행으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신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시니 고택 뒷산 배위묘에 합알하였다가 11977년 12월 20일 이곳에 옮겨 모셨다. 1945년 드디어 조국이 광복되고 정부는 영전에 건국공로훈장을 바쳤다. 예산모현사업회는 순국기념비를 예산역전에 세웠다가 향천리 충의공원으로 이건하였다. 배위 여흥민씨는 1914년 7월
16일 하세하시었다. 독자 영대 보는 경주 김씨를 취했고 의사님과 그 동지들의 광복투쟁상을 밝히고자 진력했다. 사위는 이동호이고 손자 경식은 공학사로 창령성경숙을 아내로 맞았고 손서는 이회주, 이인섭, 박찬욱, 김상철이고 증손 현주 또한 명특하다. 이에 삼가 명하건대 쌍효칠충 충효문의 일우 의사는 큰별빛이 광복회의 왕별되어 조국광복 문 여셨네. 살신성인 순국하여 몸은 한줌 흙이 되고 일월쟁광 임의 충혼 이곳에서 쉬시오 만위대 한나라 사랑 온겨레에 살아남아 그 정기와 그 영명은 백천세에 전하리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 일우 김한종 선생 유적지를 찾았다.
김한종 선생 유적지 입구에 있는 양세정려문뒤쪽에 있는 선생과 가족들의 묘소 위치를 몰라서 탐방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었다.
양세정려문 뒤쪽으로 올라가자 묘비들이 보였다.
양세정려문 뒤쪽으로 올라가자 묘비들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김한종 의사뿐만 아니라 애국지사 김재풍, 김재정, 김원묵 선생의 묘도 같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