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 414-5
- 탐방로그
- 애국선열의거 추모기념비는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 414-5 일원에 위치하며, 해당 주소지에는 기미삼일독립운동의거 기념비 광장이 있다. 1919년 3월 6일 충화면에서 시작된 임천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7명의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당초에 1971년 건립하였다가 관리가 잘 되지 않고 비석이 간략하여 수정할 부분도 있어 이후 다시금 재건립하였으며, 현재 기념비 광장에는 해당 비석이 건립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에게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1971년 3월 저의 가친(규암 영규)의 회갑연을 약하고 대신 빈약한 기념비를 건립했으나 고증이 잘못된 곳도 있어서 1990년 8월 부산정부문서보관소에 재판기록을 찾아내어 이에 따라 새로 비를 마련키로 했다. 거룩하신 선열을 추모하고 후세에 나라사랑의 정신을 복돕기 위하여 저도 고희 행사를 약하고 선친의 뜻에 따라 이 비를 세운다.
1998년 2월 27일(고희날) 박종연 글 짓고 비 세움
1998년 2월 27일(고희날) 박종연 글 짓고 비 세움
기념비 건립 유래
기념비 건립 유래
충화 팔충골은 백제 말 성충 흥수 계백 등 팔충신이 생장하고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한 곳이요, 기미년 3.1독립운동때 의거 7인이 거사를 모의하고 임천장터로 출동한 곳이다. 본 고장 출신이신 규암 박영규 옹은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모든 일에 정의를 앞세운 분이다.규암은 광복 이후 부여의거 7인의 행적이 사장되고 있으니 작은 표석이라도 세울 것을 수십 년간 당국에 건의하였으나 사장될 우려가 있음을 걱정하시고 53번째 의거일인 서기 1972년 3월 6일에 소유임야 팔충리 73의 1번지 내에 정성껏 자비로 기미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다.그러나 서기 1986년도에 충화면 복지회관 신축부지로 그 곳 300여평을 부여군에 희사하시니 부득이 기념비는 복지회관 맞은편으로 이건하게 되었다. 또 규암의 장남인 대전 진잠중학교 박종련 교장은 서기 1990년에 부산 정부문서보관소에서 부여
충화 팔충골은 백제 말 성충 흥수 계백 등 팔충신이 생장하고 학문을 닦고 무예를 연마한 곳이요, 기미년 3.1독립운동때 의거 7인이 거사를 모의하고 임천장터로 출동한 곳이다. 본 고장 출신이신 규암 박영규 옹은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모든 일에 정의를 앞세운 분이다.규암은 광복 이후 부여의거 7인의 행적이 사장되고 있으니 작은 표석이라도 세울 것을 수십 년간 당국에 건의하였으나 사장될 우려가 있음을 걱정하시고 53번째 의거일인 서기 1972년 3월 6일에 소유임야 팔충리 73의 1번지 내에 정성껏 자비로 기미3.1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다.그러나 서기 1986년도에 충화면 복지회관 신축부지로 그 곳 300여평을 부여군에 희사하시니 부득이 기념비는 복지회관 맞은편으로 이건하게 되었다. 또 규암의 장남인 대전 진잠중학교 박종련 교장은 서기 1990년에 부산 정부문서보관소에서 부여
의거 7인에 대한 재판기록을 찾고 보니 그 분들이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치신 충의를 생각해 볼 때 기념비가 너무나 왜소하여 수차 당국에 재건을 건의하였으나 계속 미루어 오자 당신의 칠순(고희)날인 서기 1998년 2월 28일에 자비로 기념비를 다시 확대 건립하였다. 그후 3.1독립운동기념비는 세인들의 무관심속에서 잡초에 묻히는 등 관리가 소흘해져 그분들의 의거정신이 퇴색될 우려가 있자 규암의 3남인 박종만 과장의 건의로 부여군에서 충화3.1독립운동 의거 선양위원회에 사업비 2,000만원이 지원되어 기념비와 좌대를 다시 높게 개조하고 주변을 새롭게 정비 정화하여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계승하는 산교육의 장소가 되게 하였다. 본회 일동은 전 군민과 함께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의 만행을 다시금 강력히 규탄하면서 그간 애써주신 규암 3부자의 정의로운 애향봉사의 대의정신을 높이 기리고자 이 표석을 세운다.
서기 2005년 12월 20일 충화 3.1독립운동의거 선양위원회장 박종섭
서기 2005년 12월 20일 충화 3.1독립운동의거 선양위원회장 박종섭
기미 3.1독립선언
애국선열의거 추모기념비
박용화 박성요 황우경 문재동 최용철 황금채 정판동
애국선열의거 추모기념비
박용화 박성요 황우경 문재동 최용철 황금채 정판동
지금으로부터 54년전 기미 3월 1일 대한독립선언시 우리 군내에 OO 8인의 선열들은 일찍이 천도교에 입도하시여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큰 뜻을 품으시고 기회만 있으시면 왜적에게 빼았겼던 국권을 회복하려고 늘 마음속으로 무장해 오시더니 급기야 1.1운동을 맞이하자 서슴치 아니하시고 오직 민족과 조국을 위하시는 일편단심 맨주먹으로 거리낌없이 사나운 총대와 서릿발 같은 칼날 앞에 조금도 굴하지 않으시고 대한독립을 부르짖다가 마침내 왜경의 무자비한 총탄으로 치명상을 받으시고 가혹한 매와 옥고를 겪으시던 그 3.1정신을 저희들은 후배들로서 이어받을 것은 물론 기리기리 우러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계승할 것을 영전에 굳게 맹세하나이다.
이에 규암 박영규 동덕 특지로서 이 비를 건립하는 바입니다.
이에 규암 박영규 동덕 특지로서 이 비를 건립하는 바입니다.
포덕 113(서기 1972. 3월 6일)
이종해 지음 박종연 씀
이종해 지음 박종연 씀
부여군 팔충리에 있는 기미삼일독립운동의거 기념비광장으로 가는 길에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충남 부여군 충화면 팔충리 414-5 기미삼일독립운동의거 기념비광장 애국선열의거추모기념비를 찾았다.
조성 이후 뒷면 벽이 추가로 건립되었다.
조성 이후 뒷면 벽이 추가로 건립되었다.
기미 3.1독립선언 애국선열의거 추모기념비
관리번호 : 20-1-34 / 관리자 : 충남최초독립운동선양회
이곳 충화면은 충남 최초 독립만세운동의 발원지이다. 1919년 3월 6일 충화면에서 출발하여 임천장터만세운동을 주도한 7인(박성요, 박용화, 최용철, 문재동, 황금채, 황우경, 정판동)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영원히 존경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충화면 팔충리 출신의 규암 박영규 선생께서 53주기 의거일인 1972년 3월 6일 이 기념비를 최초 건립하였고, 이후 두 차례 재정비를 거쳐 2016년 4월 27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관리번호 : 20-1-34 / 관리자 : 충남최초독립운동선양회
이곳 충화면은 충남 최초 독립만세운동의 발원지이다. 1919년 3월 6일 충화면에서 출발하여 임천장터만세운동을 주도한 7인(박성요, 박용화, 최용철, 문재동, 황금채, 황우경, 정판동)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영원히 존경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충화면 팔충리 출신의 규암 박영규 선생께서 53주기 의거일인 1972년 3월 6일 이 기념비를 최초 건립하였고, 이후 두 차례 재정비를 거쳐 2016년 4월 27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기미 3.1독립선언 애국선열의거 추모기념비 - 박용화 박성요 황우경 문재동 최용철 황금채 정판동
기미 3.1독립선언
애국선열의거 추모기념비
박용화 박성요 황우경 문재동 최용철 황금채 정판동
애국선열의거 추모기념비
박용화 박성요 황우경 문재동 최용철 황금채 정판동
의거기념비를 재건립하는 취지
1910년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참담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족의 선각자요 지도자이신 천도교 제3세 교조 손병희 선생은 미구에 거국적 독립운동을 펼 것을 획책하고 그 자금과 조직과 훈련에 착수했다. 자금은 천도교 대교당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조달하고 조직 훈련은 천도교인들을 130일간 연성 수련토록 했다. 이에 교인들은 논밭을 팔아 헌납하니 교인되면 세간이 망한다는 말은 공공연한 사실이였다. 이런 맥락속에서 부여교구에서도 자금 갹출과 조직 연성을 쌓았다. 드디어 1919년 3월 5일 교인은 이 곳
1910년 우리 민족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참담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족의 선각자요 지도자이신 천도교 제3세 교조 손병희 선생은 미구에 거국적 독립운동을 펼 것을 획책하고 그 자금과 조직과 훈련에 착수했다. 자금은 천도교 대교당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조달하고 조직 훈련은 천도교인들을 130일간 연성 수련토록 했다. 이에 교인들은 논밭을 팔아 헌납하니 교인되면 세간이 망한다는 말은 공공연한 사실이였다. 이런 맥락속에서 부여교구에서도 자금 갹출과 조직 연성을 쌓았다. 드디어 1919년 3월 5일 교인은 이 곳
의 의거를 주도한 박용화씨집(충화면 팔충리 수철)에서 합숙하고 일반인은 6일 새벽에 모여 유천읍을 향하여 가니 이때 모인 군중이 50여 명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첩첩산등성길 20리를 걸어 임천관아가 보이는 솔고개에 이르렀을때는 1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회합하여 「두려운자는 빠지라」하니 최후까지 남은 분은 7인 뿐이였다. 오전 10시경 임천읍민을 선도하여 읍내를 시위하고 부여헌병대 임천분소에 이르러서는 「조선은 이미 독립했으니 너희들은 정권을 내놓아라」고 외치고 항거하다 체포되여 부여헌병대를 거쳐 공주지방법원(1919.4.4 - 5.2)에서 재판을 받고 형을 받았다. 7인의 성명(나이) 주소 형량은 박용화씨(39) 충화면 팔충리 공소로 감형 7월, 박성요씨(29) 충화면 팔충리 징역 일년, 황주경씨(45) 임천면 비전리 징역 일년, 문재동씨(52) 내산면 걸지리 징역 7월, 최용철씨(35) 충화면 팔충리 공소로 감형 6월, 황금채씨(40) 임천면 비정리 태형 60, 정판동씨(26) 충화면 팔충리(본적 서산군 남면 몽산리) 태형 60이였다. 그 중 정판동씨는 독신으로 멀리 서산에서 출가해 온 외로운 누님(정열희 부 박성순)의 의지가 되기 위해서 이웃해서 살았으나 세가 어려워서 징역 2월을 태형으로 환형 60대를 맞고 집에 돌아와 득병사하니 절손됐다. 당시 조직화된 집단 항거는 부여군내에서는 오직 이 의거뿐이었다. 그 후 이 7인의 가정은 일제 36년간을 보안법 위반의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여 박해를 당했으니 가세가 쇠퇴하여 지금도 그 후손을 찾을 수 없은 분들이 대부분이다. 나라가 광복된지 반세기가 지난 근래에 이르러 이 의거 사실을 기념하고 선열에 대한 추모사업을 일으켜 줄 것을 군내 요로와 요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