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흥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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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574-5
탐방로그
애국지사 양재흥 추모비는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565에 위치한 양재흥 선생 생가 바로 인근에 위치한다. 당초 추모비와 함께 묘소가 위치하였으나 묘소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1-1묘역 485호에 안장되어 있고 묘소와 상석이 남았다. 선생 생가 바로 앞의 충신로에서 서쪽 방면으로 지근거리에서 추모비와 옛 묘소와 상석을 볼 수 있다. 해당 추모비는 1985년 4월 2일 건립되었으며, 전 부여군수 전준기가 쓰고 당시 부여군수 정경택이 세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바로 여기에서 태어나셨다. 이려서부터 총명이 남다르고 매사에 정열을 다바치어 근면하교 성실하게 살아왔으며 가난한 농가에서 주경야독하여 행동거지를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하셨으며 원래 성품이 소박하고 외유내강하여 의지가 강했고 특히 어버이에게 효성을 지극히 다하여 뭇 사람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으셨다. 투사의 나이 27세때 한일합방이란 망국의 소식을 듣고 온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셨고 비단옷을 입지않고 웃음을 잃으셨다. 투사는 그 울분을 참지 못하고 향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운동을 도모하시던중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만세소리가 하늘을 메아리치니 바로 올떄가 왔다 하시고 3월 11일 한산시장날을 기하여 담배히 의거할것을 결심하시고, 서천군 일대와 부여군 일대의 유지들을 찾아 다니며 설득하고 태극기 3백여개를 손수 제작하시어 당일 은밀히 나누어 주며 시간을 약속했다. 그날 오전 10시 정각 보인은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시장은 온통 만세의 함성으로 지축이 흔들렸다. 깜짝놀란 왜경들은 무력으로 진압에 나셧으나 나라를 잃은 겨레의 울분은 한없이 충천하였고 투사는 죽음을 각오한채 단상을 고수했다. 잔인무도한 왜경들은 더욱 소리높여 외치는 구국투사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졌다. 그후 공주, 서대문형무소 등지에서 3년여 옥살이와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다가 투사의 나이 62세때 조국의 광복을 맞으셨다. 국가에서는 평생을 조국 광복에 몸바치신 본인에게 그 정로를 치하하려하니 "나는 내족구을 위해 할일을 했을뿐"이라하시며 포상을 극구 사양하고 농사에만 전념하시다가 1959년 2월 5일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나시니 또 하나의 큰별이 이땅에서 떨어졌다.
묘소는 이곳 금마리부락 후록에 안치하였으며 돌아가신후 1977년 12월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높이 찬양 포상하였다.
청등산 정기 받고 태어난 투사 팔충신 구국충절 이어 받았나 대한독립만세소리 한산벌에 가득하고 태극기 물결속에 우뚝서신 애국투사 오늘에야 미소짓고 고이 잠드소서
서기 1985년 4월 2일
글 전 부여군수 전준기 세움 부여군수 정경택
위치를 물어볼 사람을 찾는데, 저 멀리 묘소상석과 비석이 보였다.
애국지사 양재흥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양재흥 신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1-1묘역 485호
여기에 고이 잠든 구국투사 양재흥 선생은,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조국에 혼연히 바쳐, 배달민족의 혼을 전세계에 떨친, 애국충절의 위대한 독립투사 이시다. 그 훌륭한 업적을 온 겨레가 길이 길이 기억하고 그 거룩한 뜻을 본받고자 이 비에 새겨 영원히 후세에 전하노라.
투사의 본명은 양재흥이요 자는 희중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조상은 탐라국 양 을라왕으로 고려 원종때 용성부원군 양주운공의 27세손이며 조부의 이름은 건 이요 조모는 풍양조씨이고, 부친은 두섭이요 모친은 충주지씨이다. 2남3녀중 장남으로 서기 1884년 5월 2일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