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초왕리 528
- 탐방로그
- 금계청년회 독립만세운동 사적비는 초왕리마을회관 앞에 있으며, 근처에는 초왕1리 버스정류장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일동은 갓개(笠浦) 장터에 출동하여 일반 시장 사람들과 같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하였고 다음 3월 6일 아침에는 임천시장으로 진출할제 임천면 구 교리 생갯골 시위대가 뒤따라와 합세하여 시위하였으며 헌병주재소 다나카(田中) 분대장을 만나 "너희들은 물러가라"고 담판하였다. 금계청년회원들은 이후 홍산 강경 한산 등지에 출동하여 계속 수개월 동안 만세시위운동을 하였다. 특히 삼봉 선생은 국내 감시와 강압이 극도에 이르자 일본 및 대만에 건너가서 지하독립운동을 하였으며 대만 대중시에서는 조선인 친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자금을 거두는 등 활동하다가 1934년 6월 대만 총독부경찰에 체포 구속되어 모진 고문 끝에 동년 10월 4일 대만총독부 대중병원에서 끝내 운명하였다. 왜경은 살인의 증거를 인멸키 위하여 긴급히 시신을 화장하는 한편 부여경찰서에서는 금지되었던 대만행 도강증까지 발부하여 이 증을 지니고 긴급 방대한 백형 허섭씨에게 시신을 인계하였다. 유골이 귀국할 때 갓개포구에 마중나온 저산 8읍 유림 등 군중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10여리에 달하는 만장 행렬 뒤에 왜경 박해로 상여도 없이 뒤따르던 유골은 이곳 초왕리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충화면 노고산에 안치되었다. 군중의 반일감정은 극에 달했고 격분한 금계청년회원들의 항일시위는 최고조에 다다랐으니 감시차 행렬에 끼어든 사복 왜경 형사들은 청년회원들 기세에 눌려 혼비백산 뿔뿔이 도망가고 시위는 가족들의 만류와 마을 원로들의 간곡한 자제 당부에 따라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금계청년회는 충청남부에서 최초로 3.1독립만세를 외쳤고 초왕리는 그 진원지였다. 훌륭한 선배들을 둔 청년회원은 물론 우리 초왕리민 일동은 자긍심을 가질 것이며 더욱 더 단합하고 애향하고 나아가 애국애족하는 길을 찾아 정진하기를 바라면서 여기 초왕리에 금계청년회 독립만세운동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사적비를 건립하는 바이다. 서기 2004년 2월 10일
재건 초왕 금계청년 창립기념
1958.5.2
1958.5.2
부여군 양화면 초왕리 528 왕골(왕동) 금계청년회 독립만세운동 사적비를 찾았다.
금계 예찬 헌성비
금계 예찬 헌성비
옛 충청도 임천군 적량면 소재지로 추정되는 왕골은 옛 마한시대의 소왕국의 본거지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수가 없을 정도로 예로부터 느티나무가 수려하였고 산수좋고 인심이 순박하여 외지에서도 동경하여 마지않든 이상향이였습니다. 일제의 강점 초기에 태동한 금계청년회가 충청 서남부 3.1운동을 주도한 후 일제의 혹독한 박해와 해방 후 위정자들의 무관심으로 거의 잊혀질 무렵, 1958년 5월 2일 왕골 청년회 창립을 위한 창립총회석상에서의 일제하 금계청년회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고 박복래씨의 생생한 증언이 있었기에 회의 명칭을 "금계"로 하여 송계청년회는 재탄생하였고, 이후 왕골 전체가 생동감있게 움직이고 단합하여 "갓개장터에서 지게끈은 초왕리 사람"이란 오명을 벗어던지게 했든 1950년 대 후반, 자유당 말기 열악한 환경하에서 오직 삽과 가래질만으로 초왕리 농로 개척사업을 하고 기타 야학당 청소년 정서함양과 애향심 고취 그리고 식산장려활동 등은 가히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1960년대 후반에 일으켜 세운 "새마을사업"의 효시오, 원조요, 모태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여기 한일합방시 대한독립을 외쳤든 금계청년회 만세운동 사실을 기리는 사적비를 2004년 건립하고 1950년 대 말 재창립된 금계청년회 옛 비를 이설함에 있어 성금을 보내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든 헌성 인사의 이름을 이 작은 비에 새겨 길이 후대에 전하고져 합니다.
서기 2005. 2. 1.
금계청년회 독립운동 사적비 건립 추진위원회 위원 일동
옛 충청도 임천군 적량면 소재지로 추정되는 왕골은 옛 마한시대의 소왕국의 본거지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수가 없을 정도로 예로부터 느티나무가 수려하였고 산수좋고 인심이 순박하여 외지에서도 동경하여 마지않든 이상향이였습니다. 일제의 강점 초기에 태동한 금계청년회가 충청 서남부 3.1운동을 주도한 후 일제의 혹독한 박해와 해방 후 위정자들의 무관심으로 거의 잊혀질 무렵, 1958년 5월 2일 왕골 청년회 창립을 위한 창립총회석상에서의 일제하 금계청년회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고 박복래씨의 생생한 증언이 있었기에 회의 명칭을 "금계"로 하여 송계청년회는 재탄생하였고, 이후 왕골 전체가 생동감있게 움직이고 단합하여 "갓개장터에서 지게끈은 초왕리 사람"이란 오명을 벗어던지게 했든 1950년 대 후반, 자유당 말기 열악한 환경하에서 오직 삽과 가래질만으로 초왕리 농로 개척사업을 하고 기타 야학당 청소년 정서함양과 애향심 고취 그리고 식산장려활동 등은 가히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1960년대 후반에 일으켜 세운 "새마을사업"의 효시오, 원조요, 모태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여기 한일합방시 대한독립을 외쳤든 금계청년회 만세운동 사실을 기리는 사적비를 2004년 건립하고 1950년 대 말 재창립된 금계청년회 옛 비를 이설함에 있어 성금을 보내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든 헌성 인사의 이름을 이 작은 비에 새겨 길이 후대에 전하고져 합니다.
서기 2005. 2. 1.
금계청년회 독립운동 사적비 건립 추진위원회 위원 일동
金鷄靑年會 獨立萬歲運動 事蹟碑(금계청년회 독립만세운동 사적비)
예로부터 느티나무 수려하고 물 맑으며 예의 바르고 인심이 순박하여 살기 좋았던 이 초왕리 왕골은 한일합방 후에도 근 백척의 면내 굴지의 집단농촌마을이었든 바 서기 1918년 송수하 이만구 박복래 박학래 이동규 박경래 김태권 허환 나봉기씨 등 뜻있는 젊은 청년들이 노은 김형배씨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삼봉 허환씨를 총무로 하여 금계청년회를 조직하였으니 회원 60여명 이었다. 청년회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와 생활개선을 장려하고 애향심을 고취하였으며 이는 곧바로 애국애족정신으로 승화 발전되었다. 이듬해 기미년(1919) 고종황제가 붕어하자 청년회원 일동은 백색건을 쓰고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고 부락 뒤 왕재에 올라가 서울을 향하여 5배하고 곡하여 국장의 예를 지냈다. 하늘에 금계가 있어 새벽녁에 금계가 울면 천하의 수탉이 홰를 치고 우는 법 서기 1919년 3월 3일에 금계청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