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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 산18-5
- 탐방로그
-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 산18-5에 위치한 유준근 선생 묘소를 찾았다. 우록 유준근열사 항일운동 사적비와 같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열사의 휘는 준근이요 자는 순경이며 전주류씨이다. 호는 우록인데 대마도 유배시 면암 최익현이 지어 준 것이다. 고려말 완산백 휘 습이 시조이고 연산조에 대사간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오른 휘 헌(호 낙봉)이 13대조이며 6대조인 휘 춘영이 보령에 입향하고 증조 휘 발은 문장과 효행으로 유명하고 조고는 휘 난철이고 고는 성균생원 휘 형인데 부인 광산김씨를 맞아 1860년(경신) 보령 녹문에서 열사를 낳으니 기위담대(器偉膽大)하며 성품이 호탕하고 얽매임이 없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학문할 기회를 잃은 것이 생전의 한이 되었지만 사문의 중망을 얻고 있던 재종형 호근과 원근의 선비들을 따라 바른말을 듣고 의리를 따르기를 좋아하였으며 악한 것을 싫어하되 원수처럼 하였다. 늦게 주경야독하여 우암 송시열의 의리론을 숭모하여 더욱 의리와 지조가 굳어 족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이 노성 궐리 사강회에서 전국에 납세 거부 투쟁을 역설함에 열사는 보령 유림들과 연명하여 통문을 돌리고 납세 거부 투쟁을 전개하던 중 관리가 세금을 징수하러 왔을 때 누구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하는가 라고 힐책하면서 관리를 묶고 매질을 하였다. 이로 인해 투옥되었지만 군수도 어찌하지 못하고 석방하고 말았다.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거의토적(擧義討賊)하고자 하는데 두려워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열사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대부들은 경복하면서 거의에 동의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병오)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으로 진격하는 도중 남포읍성에 머물면서 열사를 불렀다. 병중이었지만 기꺼이 가담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유병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당시 다른 의병진에서는 볼 수 없는 유병장의 소임은 열사가 항
일 유림들 사이에서 얼마나 명망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일 것이다. 얼마 후 왜병의 야습으로 성문이 파괴되면서 홍주성이 무너지자 의병장 이하 모두 피신하기 급급했지만 오직 열사는 피신하지 않고 의병관련 기록을 소각한 후 당당하게 체포되었다. 의병진에 가담한 유림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체포된 의병들에게 가혹한 심문이 행해질 때 열사가 나서서 가담자는 나와 몇 사람뿐이니 우리를 처벌하고 모두 돌려보내라 호통을 쳐서 많은 사람들이 석방될 수 있었다. 그 후 열사는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른 8명의 의사와 함께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낯선 이국 땅에서 4년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마는 그들이 주는 옷은 끝내 입지 않았고 모두 강제 노동을 당했지만 열사는 마당에 내려가 풀 한 포기도 뽑지 않았다. 이 때 면암 최익현도 이곳에 유배되어 열사는 소학을 가지고 배움을 청하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며 면암의 병이 깊어지자 자식처럼 주야로 간호하였다. 1909년 고국에 돌아온 후 늦게 아들을 낳았으나 일제의 호적에 올리지 않아 보령경찰서에 구금되어 온갖 협박을 당했지만 끝내 입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열사는 보령 집성당과 청주 만동묘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윤석봉 김복한 김상덕 유호근 조구원 백관형 최영조 조재학 등 지역 및 전국의 항일 유림들과 도의지계(道義之契)를 맺고 의리를 논하면서 항일의지를 다져 나갔다. 1912년 고종황제의 밀명으로 임병찬에 의해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직되엇을 때 충청도 대표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한 후 순종황제의 복위와 독립국 선포를 청원하는 상소문을 소두가 되어 추진하여 조선독립을 도모하였으며 이어서 열사와 문일평 등 조선민족대표 12인은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한다는 12인 등의 장서를 연명하여 총독부에 전달하는 한편 종로 보신각에서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낭독하는 활동으로 만세 시위 확산을 도모하였다. 또 1919년 서울에서 심산 김창숙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을 국제 정의에 호소하는 파리장서운동 추진을 협의하고 전국의 유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각 지역에 책임자들이 나섰는데 열사는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였다. 이 때 낙학파의 거두 간재 전우가 동참을 거절하니 열사는 이에 맞서 당당히 그와 독립운동의 당위성과 방법론에 대하여 논쟁을 하였다. 이 파리장서에는 전국 유림 137인이 서명하였고 열사도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일련의 사건들로 체포되어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수감된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깎였지만 열사만은 저들도 어찌하지 못하였다. 1920년 일제의 유교 어용화 정책 반대와 유교 윤리 진작을 통한 항일운동을 위하여 경향의 유림들이 인도공의소를 설립하였고 경향과 지역의 유림들은 열사가 보령의 대표
가 되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열사는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왜경은 행인들에게 전염병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열사는 이를 수치로 여기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 후 1920년(경신) 8월 그 전염병으로 녹문 본가에서 서거하니 향년 61세였다. 원근의 사우들은 제문과 만사를 지어 열사의 일생을 추모하면서 「우리 고을에는 이제 사람이 없게 되었다. 누구와 의리를 논하며 국가의 회복을 바라겠는가」라고 하면서 애도하였다. 이것은 열사가 사람을 움직일만한 권세나 위치를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리가 자연히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초야에서 일어나 수많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꺽이지 않은 그 불굴의 항일의지와 투쟁은 귀신에게 물려도 부끄럽지 않고 천하후세에 말해도 당당할 수 있으리라. 1977년 정부에서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여속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올려 추서하였다. 1980년에 묘전에 세운 비문이 소략하여 이시우 보령시장님과 김철형 시의원님 그리고 보령문화연구회의 주선으로 손 긍수 종수가 묘역을 정비하고 열사의 항일위적(항일위적)을 드러내고자 함에 비록 단문이지만 삼가 대망을 추리어 이와 같이 적는 바이다.
서기 2004년 4월 일
장수후인 황의천 지음 보령시장 이시우 세움
서기 2004년 4월 일
장수후인 황의천 지음 보령시장 이시우 세움
항일(抗日) 애국열사(愛國烈士) 류준근(柳濬根)
생몰 : 1860.12.18. ~ 1920.8.5. / 출생 : 충남 보령시 (내항동 녹문마을) / 수훈 :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 / 묘소 : 충남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 산 18-3번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경(舜卿), 호는 벽서(碧棲).우록(友鹿). 진사 형중(馨仲)의 아들이다.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납세를 거부하고 을사오적과 일본의 침략행위를 공박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6년 5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산지치(鴻山支峙)에서 거의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홍주성을 함락한 뒤 유병장(儒兵將)과 참모에 임명되었다.
5월말 홍주성이 함락될 때 일본군에게 잡혀 무기형을 언도받고 남규진(南奎振) 등 8인의 동지와 함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최익현이 유배되어 오자 척사사상을 논하고, 우국시로 화답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백관형(白觀亨) 등 10여 명과 함께 상경하여 순종의 복위운동을 꾀하던 중 일본경찰에 잡혀 그해 11월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에 유림대표 137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으며, 일반유림인사의 안이한 수사선도(守死善道)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독립투쟁 전개를 역설하였다.
문집 「마도일기(馬島日記)」는 홍주의진의 활약과 대마도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일기체로 서술한 것으로 의병운동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올려 추서하였다.
2016년 7월 1일 보령시장
생몰 : 1860.12.18. ~ 1920.8.5. / 출생 : 충남 보령시 (내항동 녹문마을) / 수훈 :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 / 묘소 : 충남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 산 18-3번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경(舜卿), 호는 벽서(碧棲).우록(友鹿). 진사 형중(馨仲)의 아들이다.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납세를 거부하고 을사오적과 일본의 침략행위를 공박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6년 5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산지치(鴻山支峙)에서 거의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홍주성을 함락한 뒤 유병장(儒兵將)과 참모에 임명되었다.
5월말 홍주성이 함락될 때 일본군에게 잡혀 무기형을 언도받고 남규진(南奎振) 등 8인의 동지와 함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최익현이 유배되어 오자 척사사상을 논하고, 우국시로 화답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백관형(白觀亨) 등 10여 명과 함께 상경하여 순종의 복위운동을 꾀하던 중 일본경찰에 잡혀 그해 11월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에 유림대표 137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으며, 일반유림인사의 안이한 수사선도(守死善道)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독립투쟁 전개를 역설하였다.
문집 「마도일기(馬島日記)」는 홍주의진의 활약과 대마도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일기체로 서술한 것으로 의병운동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올려 추서하였다.
2016년 7월 1일 보령시장
우록(友鹿) 류준근(柳濬根) 열사 묘 ./ 위치 : 충남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 고잠마을
류준근(1860~1920) 열사는 보령 대천의 녹문에서 태어나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세금 납부 거부 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민종식(閔宗植) 의
홍주 의병진에 가담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유병장(儒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홍주성이 무너지자 모두 피신하기 급급했지만, 열사는 의병관련 기록을 소각한 후 체포되었다. 그 후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른 8명의 의사와 함께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4년만인 1909년 고국에 돌아왔으며, 늦게 아들을 낳았으나 일제의 호적에 올리지 않는 등 일제정책에 계속 저항하였다. 1912년 고종황제의 밀명에 의해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을 때는 충청도지역 대표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때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한 후 순종황제에게 복위하여 나라를 독립국으로 통치해 달라는 상소문을 소두(疏頭)가 되어 추진하였으며, 조선민족대표 12인은 독립이 이루어질때까지 투쟁한다는 〈12인등의장서〉에 연명(聯名)하여 총독부에 전달하는 한편,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낭독하는 활동으로 3.1만세 시위확산을 도모하였다. 이어서 우리의 독립열망을 국제정의에 호소하는 파리장서운동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협의하고 전국의 유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전라도 계화도에 은거하던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찾아가 동참을 권유하였으며, 또한 유림대포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20년 일제의 유교 어용화 정책 반대와 유교 윤리 진작을 위하여 경향(京鄕)의 유림들이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를 설립하였을 때, 경향과 지역의 유림들은 열사가 보령 지역의 대표가 되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열사는 서울로 가게 되엇는데, 예산 대흥에서 왜경이 행인들에게 전염병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열사는 왜경에게 예방주사를 맞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가 얼마 후인 1920년 8월 그 전염병으로 향년 61세에 녹문본가에서 서거하였다. 1977년 정부에서는 건국포장을 추서(追敍)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올려 추서하였으며, 추강(秋江) 백낙관(白樂寬), 만취(晩翠) 황재현(黃載顯), 玉齋(옥재) 白觀亨(백관형),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과 함께 보령 5열사 중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다. 이곳 묘소는 2003년 새롭게 정화하였다.
류준근(1860~1920) 열사는 보령 대천의 녹문에서 태어나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세금 납부 거부 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민종식(閔宗植) 의
홍주 의병진에 가담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유병장(儒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홍주성이 무너지자 모두 피신하기 급급했지만, 열사는 의병관련 기록을 소각한 후 체포되었다. 그 후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른 8명의 의사와 함께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4년만인 1909년 고국에 돌아왔으며, 늦게 아들을 낳았으나 일제의 호적에 올리지 않는 등 일제정책에 계속 저항하였다. 1912년 고종황제의 밀명에 의해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을 때는 충청도지역 대표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때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한 후 순종황제에게 복위하여 나라를 독립국으로 통치해 달라는 상소문을 소두(疏頭)가 되어 추진하였으며, 조선민족대표 12인은 독립이 이루어질때까지 투쟁한다는 〈12인등의장서〉에 연명(聯名)하여 총독부에 전달하는 한편,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낭독하는 활동으로 3.1만세 시위확산을 도모하였다. 이어서 우리의 독립열망을 국제정의에 호소하는 파리장서운동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협의하고 전국의 유림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전라도 계화도에 은거하던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찾아가 동참을 권유하였으며, 또한 유림대포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20년 일제의 유교 어용화 정책 반대와 유교 윤리 진작을 위하여 경향(京鄕)의 유림들이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를 설립하였을 때, 경향과 지역의 유림들은 열사가 보령 지역의 대표가 되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열사는 서울로 가게 되엇는데, 예산 대흥에서 왜경이 행인들에게 전염병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있었다. 열사는 왜경에게 예방주사를 맞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가 얼마 후인 1920년 8월 그 전염병으로 향년 61세에 녹문본가에서 서거하였다. 1977년 정부에서는 건국포장을 추서(追敍)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올려 추서하였으며, 추강(秋江) 백낙관(白樂寬), 만취(晩翠) 황재현(黃載顯), 玉齋(옥재) 白觀亨(백관형),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과 함께 보령 5열사 중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다. 이곳 묘소는 2003년 새롭게 정화하였다.
愛國烈士 友鹿 柳公 濬根 之墓(애국열사 우록 류공 준근 지묘)
류열사는 보령 5열사의 한 분이니 경술국치 때 항일의병장으로서 용감히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권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여 유인생활 4년의 고초를 겪으며 오직 구국과 동포애로 일관하다 폭사한 독립유공자인바 자는 순경 호는 우록이다. 열사는 서기 1860년 경신 12월 18일에 진사 전주 류공 형의 아들로 녹문리에서 출생하고 시조인 완산백 휘 답은 그 18대조요 조부는 휘 난철 어머니는 광산김씨요 부인은 여흥민씨이다. 조실부모하여 수학 기회를 놓쳤건만 총명이 과인하고 판단력이 명확하여 어른도 감복했다. 망국을 비분강개하여 적병에 항거할새 의병대장 민종식의 주모로 서주 비인 남포 보령 결성의 의병장이였던 열사는 병진 4월에 일경이 경찰 70여명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홍주성에 밀입하매 이를 섬멸하니 다시 적장 다나까 소좌란 자가 무장군 수백명을 끌고 동문으로 엄습하니 적과 백병전이 벌어져 맨주먹인 우리 의병들은 장렬히도 옥쇄할제 홀로 대장만 피신함을 본 열사는 의병명부를 소각 후 병력 같은 소리로 의병장 류모 여기 있다 외치니 이윽고 적군에게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 무기형을 치루게 되어 그 옥고는 생불여사 이면서도 고종임금께 대한 충성심은 한결 같았고 그들이 주는 의식은 전혀 거부하고 식음을 전폐할새 강식을 당하면서도 그의 거동에는 위엄이 서려있어 적추까지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의 협기와 애족심이 출중하였음을 이루다. 기록하지 못함은 애석한 바이나 구국애족한 거룩한 업적은 길이 청사에 빛날 것이다. 그는 대한민족의 구국대운동에 앞장 서 주동 하려다가 상경길에 폭질로 누운채
졸서하니 향년 61세였다. 아들 남규가 선영하로부터 이곳 청소면 신송리 고령 유좌로 이묘하였다. 손은 2인 인바 긍수 종수요. 증손은 봉희 성희 은희 장희 양희 경희이니 충렬지가에 필유여경이란 실로 허언이 아니로다. 우리 대한국민으로 태어난 자 누가 나라를 사랑않으며 걱정하지 않을 이 있으리오마는 타고난 협기와 무쌍한 용기로써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린 분은 바로 우록 류열사이다. 대한민국은 열사의 건국공로를 기리어 서기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므로 위국정충의 대의를 본받아 조국의 강성과 민족의 중흥을 도모함에 있어 열사의 숭고한 정신을 경모하고 동포들로 하여금 애국의 지표가 되게
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80년 경신 10월 일
보령군수 설인진 세움
성주후인 이동권 지음
장수후인 황면주 씀
서기 1980년 경신 10월 일
보령군수 설인진 세움
성주후인 이동권 지음
장수후인 황면주 씀
友鹿 柳濬根 烈士 抗日運動 事蹟碑(우록 류준근 열사 항일운동 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