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제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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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12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몰려 1905년 12월 고군산도에 유배되였다가 우국충정을 인정 특별사면되여 법부 참사관에 임명되였으나 끝내 불복하시고 1910년 경술지변을 맞게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남하 마산에 은거하시면서 우국지사들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셨음. 2. 국채보상운동 일본이 을사보호조약 이후 한국의 근대화를 위한 시정 개선이라는 미명하에 1906년 일본 흥업은행으로부터 1천3백만원의 차관을 받아쓰게 하였으나 이는 침략을 위한 술책이엿음에 일제의 경제적 침략을 벗어나기 위하여 국채를 갚아야 한다는 일대 구국운동이 일어나게 되였다. 지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및 우국지사들에게 공한을 내여 국채보상운동에 동조할 것을 호소하니 이 운동은 전민족의 호응을 얻어 거국적인 민족구국운동으로 번지게 되였다. 이 운동의 발단은 당시 대구의 광문사 사장으로 계시던 김광제 지사와 동지 서상돈의 제창으로 시작되였다. 지사는 이 운동을 확산키 위하여 단연회의 조직과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를 발기하시고 국채보상 연합회의소의 총무직을 맡아 이 운동을 지도하시였다. 이 운동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3개월동안에 모금액이 무려 2백 31만원에 달하였으나 이 운동의 확대에 겁을 먹은 일본은 배일운동이라 탄압하고 간부들을 보상금 횡령이란 오명을 씌워 투옥하니 이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으며 후에 무죄로 석방되시였다. 3. 대한협회 구국계몽운동 한말의 독립단체이던 대한자강회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방 당한 후 자강회원인 독립투사이며 언론인인 신채호 장지연 남궁억 오세창 등과 함께 계몽지 대한협회 회원으로 계시면서 호남지방의 시찰원으로 민족자결을 역설하고 문화적 계몽운동을 통한 주권 수호와 봉건적 질서의 해체를 외치면서 구국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하시였다. 3. 노동운동을 통한 민족계몽운동 3.1운동을 전후하여 조선노동대회 경성본부장 및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계시면서 전국각지의 순
회 강연을 통하여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민족주의 이념을 불어넣으므로써 구국 항일운동을 전개하시였다. 그러나 지사는 한 맺인 조국광복의 서광을 보지 못하신 채 1920년 6월 9일 암약하시던 마산에서 서거하셨으니 우리는 지사의 조국에 대한 충절과 고매한 애국청신을 숭모하며 1982년 8월 15일 독립유공으로 대통령 서훈을 추서받으셨으니 자손만대에 숭고한 유훈을 기리기 위하여 지사의 묘역에 공적비를 세우다.
서기 1984년 8월 15일 애국선열 묘소 정화사업 추진위원 근식 손 병렬 근서
지사 동양자 김광제 지묘. '동양자'는 선생의 호이다.
통정대부 비서원승
경주김공 광제지묘
통정대부 비서원승 경주김공 광제 묘비명
김공의 휘는 弘濟(홍제) 또는 洪濟(홍제)이고 독립운동기 이후 광제라 하였다. 시호는 석람, 자는 덕재이며 애국동지들이 아호를 동양자라 하였다. 서기 1866년 병인 7월 1일 보령 능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비범하여 인품이 영명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문학에 뜻을 두어 훌륭한 유고집과 강연집을 남겼다. 23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고종 25년 4월 병조 효력부위 용양위 부사용에 제수되고,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 통훈대부 행 훈련원 첨정, 통훈대부 비서원승에 오르고, 호남 관찰사, 동래 경무관을 역
임하였으나 1905년 일제의 을사5조약에 항거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같은해 12월 배일 및 내정 부패 탄핵 상소로 인하여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후 특별 사면되어 법부 참사에 임명되었으나 불복하였다. 1906년 대구로 내려가 광문사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보급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운동과 애국계몽을 위한 강연활동을 하였으며, 1907년 서상돈 등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운동은 거국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되니 일제의 끈질긴 파괴공작으로 좌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일신학교를 세우고 해외교육 구국운동에도 헌신하였으며, 다시 국내에 들어와 노동단을 조직,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전국각지를 순회하며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애국의 뜻을 펴지 못하시고 1920년 (음) 6월 9일 향년 55세에 객지 마산에서 순국하셨다. 1982년 8월 15일 독립유공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김공이 충의의 일념으로 평생을 바친 투철한 애국사상은 세세무궁 우리의 민족혼으로 승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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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 웅천읍 평리에 있는 김광제 선생 묘소를 찾아가는데 다행스럽게 길에서 안내판을 손쉽게 만났다.
GPS상의 주소는 보령시 웅천읍 평리 122-1이다.
지사 김석람 선생 경모비. 석람은 김광제 선생의 시호이다.
부인 서림이씨 효열비
혜산김공 성열 기공비
강직한 집념을 한 뜻에 모아
내 고장 발전 위해 바치신 정성
그 은덕 깊은 가슴 헤아릴 길 없어
동민 모두 마음 모아 영원토록 기리리라.
독립지사 김광제 국채보상운동 기념비
국채 1천3백만원 보상 취지 대구광문사장 김광제 서상돈씨 등 공함 삼가 아룁니다. 무릇 신민이 충으로 행하고 의를 숭상하면 이로써 그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평안을 누리며, 불충하고 의가 없으면 이로써 그 나라는 망하고 백성이 멸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음이라... 아! 그러나 우리 2천만 동포는 나라와 백성이 이처럼 위난의 지경인데도 결심하는 이 한 사람 없고 방도를 헤아려 기획하는 일이 한가지도 없으며, 황제폐하께옵서 정사에 골몰하시며 깊은 근심에 젖어있음을 보고서도 모두가 수수방관하고 있으니 나라가 멸망해도 괜찮단 말씀인지... 지금이 바로 우리가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열심하며 충의를 분발할 때가 아니리오. 지금 우리의 국채 1천 3백만원은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이를 갚으면 나라는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 추세이라.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려운 형편인즉 장차 삼천리 강토는 우리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되지 못할 것이라... 일반 국민들은 국채를 국민의 의무로 갚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시대의 추세를 모르는 소이라 말하며, 갚을 책략이 없어 불가능이라 말하고 있음이라. 그러나 국채를 갚을 한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다지 힘들지도 않고 재산을 축내지 않고서도 돈을 모으는 방도인 것이라. 2천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끈어 한 사람이 한달에 이십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천3백만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일원, 십원, 백원, 천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일이라 국민들이 당연한 의무로 여겨서 잠시만 결심하면 되는 일이니.. 아! 우리 2천만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사항이 있는 이가 있다면 이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우리들이 감히 이를 발기하고 그 취지문을 부치면서 피눈물로 엎드려 원하노니, 대한의 신민 첨군자는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여 알려서 모르는 이 한 사람도 없게하여 기필코 실시함으로써 위로는 성명에 보담하고 아래로는 우리 강토를 유지하게 된다면 이 이상 더 다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광무십일년 이월 이십일일자 국채보상운백일주년기념 이천팔년 칠월 십일일 건립
독립지사 김광제 추모사업회장 이완상 기증 보령제약 그룹회장 김승호
지사 석람 김광제 선생 공적비
통정대부 비서원승 석람 김공 독립운동 공적비
독립지사 석람 김광제 선생은 1866년 7월 1일 충남 보령군 용천면 평리에서 출생하시여 고종 25년 병조 효력부위 용양위 부사용에 제수되여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 통훈대부 행 훈련원 첨정 정3품 통정대부 비서원승 호남 관찰사 동래 경무관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셨음
항일독립운동 요약 1. 배일 내정 부패 탄핵 상소 유배 일본은 병자 수호조약 이후 국제정변 등을 통하여 점차 한국 침략을 노골화 1905년 드디어 경성의 경찰치안권을 빼았고 일본군이 궁성을 수비하게 되자 당시 경무관이던 지사는 분연히 친일배들의 간흉을 항론하고 관권의 부패와 타락을 상소 탄핵하였으나 도리혀 간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