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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산22
- 탐방로그
- 1906년 12월에 순국하였을 때 아들 최치영이 초빈하였다가 이듬해 10월에 면천 고자리에 장사지냈다. 이후 2003년에 해당 묘역에 이장하여 모신 것이다. 진시 송산면 매곡리 산22에 위치한 최구현의 항일독립 대의비 옆의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온 곳에 위치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면천감옥에 갇히고 왜 수비대의 악귀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 지경에 동지달 선생의 전답 30결을 면천오문에 몰수당하고서 수레에 실려 출옥하였으나 선생은 회생치 못하시고 결국 섣달23일 닭울림새 운명하시니 13세 된 아들 치영이가 숱모루언덕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 정미년 10월 20일 면천 고잔리 선영에 장사하였다.
면천창의군막하군사 삼가쓰다.
면천창의군막하군사 삼가쓰다.
항일의병대장 유곡 최구현 선생 묘지문(한글 번역)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다. 선생은 동치 병인년(1866년)에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년(1887년)에 무과급제하고, 이듬해 무자년(1888년)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었다. 광무 8년(1904년)에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를 핑게 삼아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이 가망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국정을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1905년)을 당하자 의기를 참을 수 없어 병오년(1906년) 봄에 기지시(당진군 송산면)에 창의도소를 열고 창의문을 널리 써 붙였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이 370명이 달려왔다. 여기에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이 나온 고을을 돌며 위세를 드날리며 행군을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선생은 4월17일 초저녁 면천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왜의 수비대가 맹렬히 되받아 쏠 뿐만 아니라 왜의 신식 총포의 위력이 더 없이 강해서 의병의 창과 칼과 화승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이 트는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며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죽기를 한하고 왜놈과 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당도하니 그곳에는 이미 당진 의병과 화성 의병장 홍일초 창의장 군사 등 40여명이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이어 윤 4월5일 관군에게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의병 등 일진 15명이 도착하니 의병이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왜를 멸망시킬 싸움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간도로 향한 항해를 준비할 때, 7월5일 새벽 관군과 왜 수비대 200~300명이 나무 실은 배로 위장한 세 척의 배로 기습하여 선생은 잡혀서 면천 감옥에 갇히고, 왜 수비대의 악귀 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동지달에 선생의 전답 30결을 면천 아문에 몰수 당하고 수레에 실려 출옥하였으나 선생은 소생치 못하시고 결국 섣달(12월)23일 축시(새벽 1~3시)에 운명하시니 13세 된 아들 치영이가 숱모루 언덕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 정미년(1907년) 10윌20일 면천 고잔리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
면천창의군 막하군사 삼가 적음.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다. 선생은 동치 병인년(1866년)에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년(1887년)에 무과급제하고, 이듬해 무자년(1888년)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었다. 광무 8년(1904년)에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를 핑게 삼아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이 가망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국정을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1905년)을 당하자 의기를 참을 수 없어 병오년(1906년) 봄에 기지시(당진군 송산면)에 창의도소를 열고 창의문을 널리 써 붙였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이 370명이 달려왔다. 여기에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이 나온 고을을 돌며 위세를 드날리며 행군을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선생은 4월17일 초저녁 면천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왜의 수비대가 맹렬히 되받아 쏠 뿐만 아니라 왜의 신식 총포의 위력이 더 없이 강해서 의병의 창과 칼과 화승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이 트는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며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죽기를 한하고 왜놈과 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당도하니 그곳에는 이미 당진 의병과 화성 의병장 홍일초 창의장 군사 등 40여명이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이어 윤 4월5일 관군에게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의병 등 일진 15명이 도착하니 의병이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왜를 멸망시킬 싸움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간도로 향한 항해를 준비할 때, 7월5일 새벽 관군과 왜 수비대 200~300명이 나무 실은 배로 위장한 세 척의 배로 기습하여 선생은 잡혀서 면천 감옥에 갇히고, 왜 수비대의 악귀 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동지달에 선생의 전답 30결을 면천 아문에 몰수 당하고 수레에 실려 출옥하였으나 선생은 소생치 못하시고 결국 섣달(12월)23일 축시(새벽 1~3시)에 운명하시니 13세 된 아들 치영이가 숱모루 언덕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 정미년(1907년) 10윌20일 면천 고잔리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
면천창의군 막하군사 삼가 적음.
광무십년면천창의영도장유곡최구현선생묘지(光武十年沔川倡義領導將楡谷崔九鉉先生墓誌)
先生字仁成號楡谷先生同治丙寅生於沔川郡梅塩里光緖丁亥武科及第戊子入仕訓練院奉事至光武八年甲辰倭以韓日議定書壓迫國政難望國運也至於是先生歎淚國政辭任軍部參書官焉然當乙巳勒約不勝義氣丙午倡義都所開設於機池市榜布倡義文沔川唐津古德天宜餘味義兵馳到者三百七十名也於是先生被推戴倡義領導將統率義兵連十五日間宣威行軍於起義兵地州使民興起討倭義憤四月十七日初更攻討沔川城官軍與倭備隊應射熾烈莫强倭新銃砲以義兵之槍劍與火繩銃不可勘當焉遂五更彈雨中收斂死傷義兵飮泣解散時先生將限死義兵三十六名乘夜行軍四月卄三日當到蘭芝島旣到唐津倡義兵與華城倡義將洪一初軍等合爲四十餘名雄據矣繼此閏四月初五日被遂於官軍者瑞山義兵參謀金泰淳一陣卄八名合流閏四月十六日來到洪州城敗走車相吉義兵一陣十五名都合義兵百卄餘名也於是爲欲持續滅倭戰向間島航海豫備時七月初五日寅時官軍與倭守備隊二三百名以僞裝薪木船三隻奇襲先生被捉囚於沔川衙門因倭守備隊之惡鬼拷問先生幾至死境至月私田卅結被奪於沔川衙門後載車出獄不能蘇生遂臘月卄三日丑時殞命嗣子致英十三年乃草殯炭隅而丁未十月卄日葬于沔川高棧里先塋側也
沔川倡義軍幕下軍士 謹記
先生字仁成號楡谷先生同治丙寅生於沔川郡梅塩里光緖丁亥武科及第戊子入仕訓練院奉事至光武八年甲辰倭以韓日議定書壓迫國政難望國運也至於是先生歎淚國政辭任軍部參書官焉然當乙巳勒約不勝義氣丙午倡義都所開設於機池市榜布倡義文沔川唐津古德天宜餘味義兵馳到者三百七十名也於是先生被推戴倡義領導將統率義兵連十五日間宣威行軍於起義兵地州使民興起討倭義憤四月十七日初更攻討沔川城官軍與倭備隊應射熾烈莫强倭新銃砲以義兵之槍劍與火繩銃不可勘當焉遂五更彈雨中收斂死傷義兵飮泣解散時先生將限死義兵三十六名乘夜行軍四月卄三日當到蘭芝島旣到唐津倡義兵與華城倡義將洪一初軍等合爲四十餘名雄據矣繼此閏四月初五日被遂於官軍者瑞山義兵參謀金泰淳一陣卄八名合流閏四月十六日來到洪州城敗走車相吉義兵一陣十五名都合義兵百卄餘名也於是爲欲持續滅倭戰向間島航海豫備時七月初五日寅時官軍與倭守備隊二三百名以僞裝薪木船三隻奇襲先生被捉囚於沔川衙門因倭守備隊之惡鬼拷問先生幾至死境至月私田卅結被奪於沔川衙門後載車出獄不能蘇生遂臘月卄三日丑時殞命嗣子致英十三年乃草殯炭隅而丁未十月卄日葬于沔川高棧里先塋側也
沔川倡義軍幕下軍士 謹記
출토묘지 필사본
옆에는 최구현의병장의 아드님 묘소가 있었다.
뒷편에 있는 최구현의병장의 부친 묘소
항일의병대장 최구현선생 묘소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본관은 경주고 1866년(고종3) 면천군 매염리(현 매곡리)에서 통정대부 최영환공의 장자로 탄생하여 1838년 무과급제후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군부참서관으로 재임중 1904년 일제의 강요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선생은 국운을 탄식하고 위 관직을 하임하셨는데 1905년 일제는 조선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이 망국하게 되자 선생은 5000면 조선민족이 하루아침에 일제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의분을 억제할수없어 1906년 창의도소를 송악면 기지서 장터에 설치하고 의기를 높이 꽂고 창의문을 지어서 방을 붙혔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 370명이 달려왔다. 이에 선생은 의병회의에서 창의영도장(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보름동안 의병이 나오느 고을을 행군하면서 의기를 선양하여 백성의 항일의분을 불러 일으키고 4월 17일 초저녁 면천성을 총 공격하였는데 관군과 왜수비대의 치열한 반격과 왜병의 신식총포의 위력이 몹시 강했지만 그대로 의병은 밤새 결사적 공격을 퍼부었으나 의병의 창검과 구식 화승총으로는 대적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동티 트는 새벽녘 총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선생은 결사대 36명을 이끌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 23일 배를 얻어타고 난지도에 당도하니 당진의병과 화성의병장 홍일초 의병등 40여명이 먼저와서 웅거하고 있었으며, 그 뒤 윤4월5일 관군에 쪽기던 서산 의병참모 김태순등 의병 28명이 합류했고 윤4월 `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등 의병 15명이 들어오니 의병은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의병들은 왜병과의 싸움을 계속하기 위하여 간도로 가려고 항해준비를 할때인 7월 5일 새벽 관군과 왜수비대 200~300명이 나뭇배로 위장한 3척의 배로 기습하여 선생은 황망중 대항하였으나 그들에게 체포되어 면천감옥에 갇히시고 왜수비대의 악귀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지경이 된 동짓날(11월) 선생의 전답 30결을 면천아문에 몰수 당하고 업힐 수 조차 없어 소수례에 실려 가출옥하였으나 선생은 희생치모하시고 결국 섣달(12월) 23일 미명 운명하시니 이때 13세된 아들 치영이가 숱모두언덕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1907) 10월 20일 면천 고자리 선영곁에 장사지냈다. 2003년에 이 묘역에 이장하여 모신 것이다.
당진을 대표하는 의병장의 행적이 뒤늦게 알려지기까지의 뒷이야기
최구현의병장은 1906년, 일본군과의 전투 중 체포되어 모진 고문의 휴유증에 서거하셨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공개될 수 없었기에 최구현의병장의 행적은 1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땅속에 묻혀있게되었다.
솢나 충묵공이 75세되던 2003년 양력 9월 17일 새벽, 꿈에 대궐같이 큰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40대의 갓과 도포를 쓴 선비가 문패를 빠뜨리고 왔으니 찾아오라고 하여, 잠에서 깬 후 꿈의 의미를 되새기던 공은 날이 밝은 후 우천중임에도 홀리 당신 무수리에 가서 공이 태어나기 몇해전까지 최구현의병장이 모셔져 있었던 옛 묘소자리 앞쪽부분을 파헤치던 중 석고로 만들어진 묘비석을 발견하고 내용을 화깅ㄴ한후 내리는 비를 맞으며 목 놓아 통곡하였다. 묘지석의 출토이후 애뇽이 학계의 고증으로 확인된 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8월 15일 최구현의병장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그가 이끈 의병 할약상은 2005년 8월, SBS서울방송사 제작, 광복 60주년 특집 2부작 드라마 '소난지도의 영웅들'로 전국적으로 텔레비젼에 방영되었다.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본관은 경주고 1866년(고종3) 면천군 매염리(현 매곡리)에서 통정대부 최영환공의 장자로 탄생하여 1838년 무과급제후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군부참서관으로 재임중 1904년 일제의 강요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선생은 국운을 탄식하고 위 관직을 하임하셨는데 1905년 일제는 조선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이 망국하게 되자 선생은 5000면 조선민족이 하루아침에 일제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의분을 억제할수없어 1906년 창의도소를 송악면 기지서 장터에 설치하고 의기를 높이 꽂고 창의문을 지어서 방을 붙혔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 370명이 달려왔다. 이에 선생은 의병회의에서 창의영도장(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보름동안 의병이 나오느 고을을 행군하면서 의기를 선양하여 백성의 항일의분을 불러 일으키고 4월 17일 초저녁 면천성을 총 공격하였는데 관군과 왜수비대의 치열한 반격과 왜병의 신식총포의 위력이 몹시 강했지만 그대로 의병은 밤새 결사적 공격을 퍼부었으나 의병의 창검과 구식 화승총으로는 대적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동티 트는 새벽녘 총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선생은 결사대 36명을 이끌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 23일 배를 얻어타고 난지도에 당도하니 당진의병과 화성의병장 홍일초 의병등 40여명이 먼저와서 웅거하고 있었으며, 그 뒤 윤4월5일 관군에 쪽기던 서산 의병참모 김태순등 의병 28명이 합류했고 윤4월 `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등 의병 15명이 들어오니 의병은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의병들은 왜병과의 싸움을 계속하기 위하여 간도로 가려고 항해준비를 할때인 7월 5일 새벽 관군과 왜수비대 200~300명이 나뭇배로 위장한 3척의 배로 기습하여 선생은 황망중 대항하였으나 그들에게 체포되어 면천감옥에 갇히시고 왜수비대의 악귀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지경이 된 동짓날(11월) 선생의 전답 30결을 면천아문에 몰수 당하고 업힐 수 조차 없어 소수례에 실려 가출옥하였으나 선생은 희생치모하시고 결국 섣달(12월) 23일 미명 운명하시니 이때 13세된 아들 치영이가 숱모두언덕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1907) 10월 20일 면천 고자리 선영곁에 장사지냈다. 2003년에 이 묘역에 이장하여 모신 것이다.
당진을 대표하는 의병장의 행적이 뒤늦게 알려지기까지의 뒷이야기
최구현의병장은 1906년, 일본군과의 전투 중 체포되어 모진 고문의 휴유증에 서거하셨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공개될 수 없었기에 최구현의병장의 행적은 1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땅속에 묻혀있게되었다.
솢나 충묵공이 75세되던 2003년 양력 9월 17일 새벽, 꿈에 대궐같이 큰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40대의 갓과 도포를 쓴 선비가 문패를 빠뜨리고 왔으니 찾아오라고 하여, 잠에서 깬 후 꿈의 의미를 되새기던 공은 날이 밝은 후 우천중임에도 홀리 당신 무수리에 가서 공이 태어나기 몇해전까지 최구현의병장이 모셔져 있었던 옛 묘소자리 앞쪽부분을 파헤치던 중 석고로 만들어진 묘비석을 발견하고 내용을 화깅ㄴ한후 내리는 비를 맞으며 목 놓아 통곡하였다. 묘지석의 출토이후 애뇽이 학계의 고증으로 확인된 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8월 15일 최구현의병장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그가 이끈 의병 할약상은 2005년 8월, SBS서울방송사 제작, 광복 60주년 특집 2부작 드라마 '소난지도의 영웅들'로 전국적으로 텔레비젼에 방영되었다.
의병장의 손자되시는 분의 묘소였다. 의병장의 묘소를 찾아내신분이시다.
민족주의자 경주최공 휘 충묵님의 묘
손자분의 위쪽에 의병장의 묘소가 있었다.
광무10년 면천창의영도장 유곡 경주 최구현선생님의 묘
광무10년 면천창의 영도장 유곡 최구현선생 묘비문
선생이 한말에 의병에 나섰다는 권을 조실부한후 고모부님에게서 들은 선생의 종손 충묵공이 선생의 해억을 애타게 탐구하던 계미년 선생의 흔적을 혹 찾을까하고 선생의 최초 묘터를 파디기 뜻밖에 선생의 묘지(墓誌)를 발견한 후 천식에게 선생의 묘비문을 청하여 그 한문묘지를 보고 그 묘지가 바로 훌륭한 비문이라 생각하여 국역한것인데 졸역인지 송구합니다.
유곡 최구현선생 묘지 국역문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선생은 동치 병인년에 면천군 매교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선생이 한말에 의병에 나섰다는 권을 조실부한후 고모부님에게서 들은 선생의 종손 충묵공이 선생의 해억을 애타게 탐구하던 계미년 선생의 흔적을 혹 찾을까하고 선생의 최초 묘터를 파디기 뜻밖에 선생의 묘지(墓誌)를 발견한 후 천식에게 선생의 묘비문을 청하여 그 한문묘지를 보고 그 묘지가 바로 훌륭한 비문이라 생각하여 국역한것인데 졸역인지 송구합니다.
유곡 최구현선생 묘지 국역문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선생은 동치 병인년에 면천군 매교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에 무과급제하고 무자년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고 광무 8년 갑진에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를 핑계삼아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이 희망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국정을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을 당하자 의기를 참을수 없어 병오년 봄에 창의도소를 기지시에 열고 창의문을 널리써붙였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 370명이 달려왔다. 여기서 선생은 창의령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동안 의병이 나온 고을 돌며 위세를 드날리며 행군을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한다는 의분을 불러일으키고 4월 17일 초저녘 면선청을 치니 관군과 왜수비대가 맹렬히 되받아 쏠뿐만 아니라 왜의 신식 총포의 위력이 더없이 강해서 의병의 창과 칼, 화승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이트는 새벽 총탄이 비오듯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며 의병을 해산할때 선생은 죽기를 한하고 왜놈과 싸워야 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 23일 난지도에 당도하니 당진창의병과 화성창의장 홍일초 군사등 40여명이 이미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이어 윤4월 초5일 관군에 쫓기는 서산의병참모 김태순의 1진 28명이 합류하고 윤4월 1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 의병등 1진 15명이 도착하니 의병이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왜를 멸망시키 싸움을 지속키위하여 간도를 향한 항해를 준비할때인 7월 초 5일 새벽 관군과 왜 수비대 2,3백명이 나무실은 배로 위장한 3척의 베러 기습하여 선생은 잡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