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산2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오니 의병은 도합 백입여명이었다. 이에 멸왜전쟁을 지속하기 위하여 간도를 향하여 항해를 준비할 때인, 7월초5일 인시 관군과 왜 수비대 200~300명이 나뭇배로 위장한 세 척의 배로 기습하여 항망이 대항하였으나 선생은 잡혀서 면천 감옥에 수감되고,여기서 왜 수비대의 악귀 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 지경인 동지달 선생의 사전 30결을 면천 아문에 몰수 당하고서야 업힐수조차없어 소 수레에 실려 출옥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소생치 못하시고 결국 섣달23일 축시에 운명하시니 아들 치영이 13세된 이가 탄우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 정미년 10윌20일 면천 고잔리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
면천창의군 막하군사 삼가 적음.
면천창의군 막하군사 삼가 적음.
위쪽에 묘소가 있었다.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산22에 있는 의병장 최구현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고 있다.
저 멀리 비석이 보인다.
유곡 최구현선생 항일독립대의비
왜의 강화도침공에 패하고 체결한 불평등 조일 병자수호조약이래 왜의 약탈무역으로 조선경제가 파탄나고 청에 조공등 폐정과 가렴주구로 민?? 자주나고 화적 산적이 횡행하는 속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매직 수탈로 일어난 농민봉기를 학살진압하여 갑오농민전쟁으로 확대되자 고종대왕이 갑오농민전쟁진압을 종주국 청에 요청하여 청군이 아산에 상륙하고 있을때 이 첩보를 미리 탐지한 왜병이 천진조약을 기화로 인천에 먼저 상륙한??병이 청함정을 공격하여 조선땅에서 청일전쟁이 터져 조선이 무참히 짓밟히고 왜가 청을 이김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박탈하고 그 ???? 아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관군과 합세하여 척왜를 표방하고 죽창과 쾡이 관군이 버리고 간 화승총등 폐병기를 든 갑오농민군 10여만명을 왜의 ???포로 잔학하게 사살하니 사체의 산이요 피의 바다였다. 이어 왜는 각처의 농민군을 모조리 소탕하여 조선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이듬해 을미년 ???가 왜낭인을 끌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대왕의 민왕비를 살해한 후 불태웠으나 조선은 왜를 응징할 무력이 없어서 그 다음해 병신 고종대왕이 ??기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을 하고 이해를 지나 정유8월 고종대왕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고종대왕을 고종황제로 년호를 ???한다는 칙령을 발하고 10월 대한제국 고종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 대결단은 오백년전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반란후 유명조선왕으로 창???민
왜의 강화도침공에 패하고 체결한 불평등 조일 병자수호조약이래 왜의 약탈무역으로 조선경제가 파탄나고 청에 조공등 폐정과 가렴주구로 민?? 자주나고 화적 산적이 횡행하는 속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매직 수탈로 일어난 농민봉기를 학살진압하여 갑오농민전쟁으로 확대되자 고종대왕이 갑오농민전쟁진압을 종주국 청에 요청하여 청군이 아산에 상륙하고 있을때 이 첩보를 미리 탐지한 왜병이 천진조약을 기화로 인천에 먼저 상륙한??병이 청함정을 공격하여 조선땅에서 청일전쟁이 터져 조선이 무참히 짓밟히고 왜가 청을 이김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박탈하고 그 ???? 아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관군과 합세하여 척왜를 표방하고 죽창과 쾡이 관군이 버리고 간 화승총등 폐병기를 든 갑오농민군 10여만명을 왜의 ???포로 잔학하게 사살하니 사체의 산이요 피의 바다였다. 이어 왜는 각처의 농민군을 모조리 소탕하여 조선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이듬해 을미년 ???가 왜낭인을 끌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대왕의 민왕비를 살해한 후 불태웠으나 조선은 왜를 응징할 무력이 없어서 그 다음해 병신 고종대왕이 ??기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을 하고 이해를 지나 정유8월 고종대왕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고종대왕을 고종황제로 년호를 ???한다는 칙령을 발하고 10월 대한제국 고종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 대결단은 오백년전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반란후 유명조선왕으로 창???민
족 행업을 그 후손왕이 대신 사죄한다는 참회선언이며 비장한 자주독립 선포였다. 그 후 왜는 대한제국을 감싸고 도는 아라사를 쳐부수려고 항일전쟁을 일으킨후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대한제국은 왜를 당할 무력이 없었고 아일전에 아라사가 패한데다가 일제의 대한제국 점령통치를 미제가 묵인한다한 데프트가 쓰라린 비밀협정으로 미제의 후원을 얻은 왜는 을사년 11월 17일 왜병이 대한제국 시위대를 제압하고서 경복궁을 포위한 상태에서 왜가 고종황제의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니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되므로 망국의 길에 빠지고 말았다. 아! 천지가 공멸하도다! 오천년역사의 조선민족이 왜의 노예가 된다는 것인가? 이 처절한 망국과정을 알게된 유곡 최구현선생은 끓어 오르는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직 멸왜구국 자주독립 일념으로 항일의병전쟁에 이 한 목숨 받치셨으나 일제강점과 계속된 미제점령으로 굴절된 역사속에 여태까지 선생의 항일의병전쟁사실이 잊혀졌더니 선생의 군국97년만에 발굴된 선생의 묘지로 선생의 사적이 밝혀졌는데 선생은 임진왜란에 순국하신 선무원종공신 충신공 최준립장군의 12대손이시고 선친 휘 최영환공은 승문원 부제조를 역임하시고 갑오농민전쟁때 면천농민군지도사였으니 선생의 항일의병전쟁까지 300년 항일전쟁에 목숨바친 명왜호국가문이시다. 그 선생의 한문묘지가 백년전 항일의병전쟁기록이 생생하여 그 묘지국역문을 여기에 양재합니다.
항일의병대장 유곡 최구현 선생 묘지 국역문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선생은 동치 병인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 무과급제하고, 무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고 광무 8년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로써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을 난망하였다. 이에 이르러 선생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을 당하여 의기를 이기지 못하고 병오년 창의도소를 기지시에 개설하고 창의문을 써서 방을 붙혔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으로 달려온자가 370명이 되었다. 여기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으로 나온 고을길을 시위행군하여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키고 4월17일 초경 면천성의 관군과 왜 수비대를 들이치니 관군과 왜 수비대의 응사가 치열하고 왜의 신총포의 위력이 막강하여 의병의 창검과 화승총으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오경에 총탄의 빗속에서 죽고다친 의병을 들것에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업고 부축하고 피눈물을 삼키면서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한사코 왜와 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을타고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배를 얻어타고 당도하니 당진창의병과 화성창의장장 홍일초 군사 등 40여명이 이미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윤 4월초5일 관군에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하고 달려온 차상길의병 일진 15명이
항일의병대장 유곡 최구현 선생 묘지 국역문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선생은 동치 병인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 무과급제하고, 무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고 광무 8년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로써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을 난망하였다. 이에 이르러 선생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을 당하여 의기를 이기지 못하고 병오년 창의도소를 기지시에 개설하고 창의문을 써서 방을 붙혔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으로 달려온자가 370명이 되었다. 여기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으로 나온 고을길을 시위행군하여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키고 4월17일 초경 면천성의 관군과 왜 수비대를 들이치니 관군과 왜 수비대의 응사가 치열하고 왜의 신총포의 위력이 막강하여 의병의 창검과 화승총으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오경에 총탄의 빗속에서 죽고다친 의병을 들것에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업고 부축하고 피눈물을 삼키면서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한사코 왜와 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을타고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배를 얻어타고 당도하니 당진창의병과 화성창의장장 홍일초 군사 등 40여명이 이미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윤 4월초5일 관군에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하고 달려온 차상길의병 일진 15명이
족 행업을 그 후손왕이 대신 사죄한다는 참회선언이며 비장한 자주독립 선포였다. 그 후 왜는 대한제국을 감싸고 도는 아라사를 쳐부수려고 항일전쟁을 일으킨후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대한제국은 왜를 당할 무력이 없었고 아일전에 아라사가 패한데다가 일제의 대한제국 점령통치를 미제가 묵인한다한 데프트가 쓰라린 비밀협정으로 미제의 후원을 얻은 왜는 을사년 11월 17일 왜병이 대한제국 시위대를 제압하고서 경복궁을 포위한 상태에서 왜가 고종황제의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니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되므로 망국의 길에 빠지고 말았다. 아! 천지가 공멸하도다! 오천년역사의 조선민족이 왜의 노예가 된다는 것인가? 이 처절한 망국과정을 알게된 유곡 최구현선생은 끓어 오르는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직 멸왜구국 자주독립 일념으로 항일의병전쟁에 이 한 목숨 받치셨으나 일제강점과 계속된 미제점령으로 굴절된 역사속에 여태까지 선생의 항일의병전쟁사실이 잊혀졌더니 선생의 군국97년만에 발굴된 선생의 묘지로 선생의 사적이 밝혀졌는데 선생은 임진왜란에 순국하신 선무원종공신 충신공 최준립장군의 12대손이시고 선친 휘 최영환공은 승문원 부제조를 역임하시고 갑오농민전쟁때 면천농민군지도사였으니 선생의 항일의병전쟁까지 300년 항일전쟁에 목숨바친 명왜호국가문이시다. 그 선생의 한문묘지가 백년전 항일의병전쟁기록이 생생하여 그 묘지국역문을 여기에 양재합니다.
항일의병대장 유곡 최구현 선생 묘지 국역문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선생은 동치 병인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 무과급제하고, 무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고 광무 8년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로써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을 난망하였다. 이에 이르러 선생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을 당하여 의기를 이기지 못하고 병오년 창의도소를 기지시에 개설하고 창의문을 써서 방을 붙혔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으로 달려온자가 370명이 되었다. 여기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으로 나온 고을길을 시위행군하여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키고 4월17일 초경 면천성의 관군과 왜 수비대를 들이치니 관군과 왜 수비대의 응사가 치열하고 왜의 신총포의 위력이 막강하여 의병의 창검과 화승총으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오경에 총탄의 빗속에서 죽고다친 의병을 들것에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업고 부축하고 피눈물을 삼키면서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한사코 왜와 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을타고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배를 얻어타고 당도하니 당진창의병과 화성창의장장 홍일초 군사 등 40여명이 이미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윤 4월초5일 관군에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하고 달려온 차상길의병 일진 15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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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니 선생은 동치 병인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 무과급제하고, 무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고 광무 8년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로써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을 난망하였다. 이에 이르러 선생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을 당하여 의기를 이기지 못하고 병오년 창의도소를 기지시에 개설하고 창의문을 써서 방을 붙혔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으로 달려온자가 370명이 되었다. 여기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으로 나온 고을길을 시위행군하여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키고 4월17일 초경 면천성의 관군과 왜 수비대를 들이치니 관군과 왜 수비대의 응사가 치열하고 왜의 신총포의 위력이 막강하여 의병의 창검과 화승총으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오경에 총탄의 빗속에서 죽고다친 의병을 들것에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업고 부축하고 피눈물을 삼키면서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한사코 왜와 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을타고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배를 얻어타고 당도하니 당진창의병과 화성창의장장 홍일초 군사 등 40여명이 이미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윤 4월초5일 관군에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하고 달려온 차상길의병 일진 15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