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난지도 의병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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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 373-2
탐방로그
해방 후에 주민들이 의병들의 시체를 수습하여 봉분을 조성하였고, 1982년에 석문중학교 교직원 일동이 비를 세웠다. 육지에서 배를 타고 소난지도로 들어간 뒤, 선착장으로부터 걸어서 15-20분 정도 떨어진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다. 어떻게 14명의 순사에게 100여명이 몰살을 당했을까?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소난지도는 대난지도 옆 작은 섬이라 하여 소난지도라 하고, 난초와 지초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난초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고 바위틈에서 고란초가 살고 있는 모습은 눈여겨 볼 수가 있다.
조선시대 세곡을 운반하는 배가 있었을 때는 100여 척이나 정박하였다고도 한다.
도비도 선착장을 찾았다.
왜목마을은 낙조를 즐기러 오는 사람이 많아서 식당들이 많았다.
도비도 선착장에 있는 소난지도 의병무덤 소개 안내판.
하지만 소난지도, 대난지도를 가는 사람은 우리를 포함해서 전체 3명 밖에 없었다.
7:50분에 출발한 배를 타고 들어가면 오후 1시가 넘어서야 나오는 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차를 두고 승선을 했다. 나올 때에는 소형배를 알아보고 타고 나올 생각이다.
도비도 선착장에서 30분 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다.
도비도 선착장에서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이 소난지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하지만 소난지도에는 식당이 두 곳 있었지만 모두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난지도 2리 마을 유래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최초의 난지도 기록이 있은 후 여지도선 당진현지도에 당진현 내맹면 난지도로, 해동여지도에는 다시 난지도로, 그후 대동여지도(1861년)에서 최초로 소난지도가 보인후 호서읍지(1871년)에 당진현 내맹면 소난지도리는 홋수 54호, 남 110명, 여 112명으로 나와있다. 그후 당진현 도동면 난지도리로, 그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당진군 내맹면 난지도리 또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석문면 난지도리로 통합되었다. 난지도 2리는 현재 홋수 85호 인구 170명으로 소속도서는 소난지도에, 도비도, 대조도, 소조도, 분도, 우무도, 비경도이고 도비도는 연륙되어있으며 소난지도에는 갑진, 듬배의 두마을이 있다. 소난지도 포구는 옛 고려, 조선시대 전라,경상 세곡을 경창(서울 마포)으로 운송하던 조운선이 머물던 천연의 양항이었다.
또한 1908년 3월 15일(양) 일본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분개한 홍원식 의병대장등 100여명의 의병들과 일본 무장경찰과의 쌍방간 총격전으로 의병 100여명이 희생되어 그들 무명용사들의 의병총이 듬배마을에 있다.
선착장에서 약 15~20분 정도 걸어서 섬의 동쪽 끝에 있었다.
소난지도 의병무덤
을사늑약과 한국 군인의 강제 해산 등으로 경기도 수원 지역에서 홍원식(홍일초?)이 중심이 되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거병하여 유격전술로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 이들은 일분군에 밀려 배를 타고 당진으로 쫓겨왔고, 병오는 홍주 전투에서 패한 의병들과 합류하여 석문도 난지도에 의병 본진을 두어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홍주경찰 분서에 이들이 탐지되었고 다카하시가 14명의 순사를 인솔, 1908년 3월 15일 이 곳을 급습하여 9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였다. 결국 의병들은 실탄이 떨어지자 해변가 딴섬까지 후퇴하며 육탄전으로 대항하다가 최후 1인까지 장렬하게 산화했다. 소난지도 의병무덤은 우국충적으로 뭉친 애국지사들인 100여명의 의병들이 묻혀 영면하는 곳이다.
義兵塚(의병총)
이곳은 1907년 을사조약에 반기를 들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왜군과 싸우다 장열히 순국하신 홍일초 휘하 150여 의병이 고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그 거룩한 님들의 넋을 기리고 후세에 영원토록 지켜갈 교리로 삼고자 이곳에 비를 세우다.
석문중학교 교직원 및 학생 일동
충남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 373-2 소난지도에 있는 의병총을 찾아가기 위해서 도비도 선착장에 왔다.